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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5-07-15

    하안거 결제 법문 - 2005년 5월 22일

본문

본래 성불


이글은 지난 5월 22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설해진 법정스님 법문의 2005년 하안거 결제 법문을 녹취, 정리한 것입니다.


7세기 대승불교 큰 스승 중에 ‘샨띠데바’라는 인도 스님이 계십니다. 한자명으로는 ‘적천寂天 스님’이라고도 합니다. 이 분은 어떻게 보살행을 행할것인가를 두고 <입보리행론>이라는 저서를 남기기도 하셨습니다. 이 스님께서 하신 법문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이익에 헌신한다.


그대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여기서‘남’이란 나와 전혀 상관없는 타인이 아닙니다. 또 다른 내 자신입니다. 보다 큰 자기 자신입니다.


샨띠데바, 이 분은 남인도 한 왕국의 왕자였습니다. 어느날 꿈에 문수보살을 친견하면서 ‘왕의 자리는 지옥과 같다’는 말을 듣습니다. 꿈에서 깬 샨띠데바는 왕위 계승하게 될 전날 밤 왕궁을 몰래 빠져나와 나란다사로 가서 출가를 합니다. 인도 불교 역사를 보면 부처님을 비롯해서 왕자들이 왕위계승권을 버리고 출가하는 사례가 더러 있는데 샨띠데바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출가한 스님의<입보리행론>에 보면 보리심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보리심을 일으키는 마음(발보리심)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심을 행하는 마음(행보리심)입니다. 보리심이란 곧 자비심을 말합니다.


계절의 여왕 5월에 길상사에서는 일요일마다 큰 집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5월은 하안거 결제기간이라서 꼭 절에 올 사람들만 오시리라 생각합니다. 덕분에 이절의 전속배우인 저도 그 때마다 출연하고 있습니다. 세 번 연거푸 출연하는데, 지겹지 않으세요? 연속극도 아닌데 3회 연속 나오고 있는데, 오늘 아침은 나오면서 중노릇이 이런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세상에는 크고 작은 절들이 많습니다. 조용히 있고 싶어도 사바세계의 이런 구조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길상사의 경우는 보현회 보살님과 관음회 보살님, 거사림회 거사님들의 수고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후원에서 음식을 준비하시는 보살님들의 노고가 매우 큽니다. 흔히 생사대사라 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하고 현실적인 문제는 식사대사입니다. 먹는게 큰 일이란 말입니다. 식사대사가 곧 생사대사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도 혼자 살면서 제일 골치 아픈 것ㄷ이 먹는 일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누군가 식구, 대중들을 위해서 수고해야 합니다. 아무 보상도 없이 헌신하는 것, 이것을 학자들은 ‘그림자 노동’이라고 합니다. 뒤에서, 그림자처럼 묵묵히 일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말없이, 싫어하는 내색 없이, 기쁜 마음으로 일하는 모습을 볼 때면 살아있는 보살의 실체를 대한다는 느낌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말로만, 입으로만 보살과 부처를 말하지만 실제로 후원에서 많은 대중들의 음식을 준비하는 분들은 묵묵히 스스로가 보살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종교가 무엇인지 불교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잘 아시다시피 종교의 본질은 공허한 이론에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팔만대장경과 조사어록 등은 모두 공허한 이론에 불과 합니다. 불교는 발보리심에서 출발하여 행보리심으로 회향해야 합니다. 개체에서 출발하여 전체에 이르는 길이란 말씀입니다.


배움의 과정을 문聞, 사思, 수修 의 세가지 과정으로 나누기도 합니다. 어떤 가르침을 듣고, 그 뜻을 깊이 생각하면서, 몸소 그렇게 실천하는 것, 닦아가는 것이란 의미입니다.


여기서 닦음이란 행보리심과 같습니다.


‘닦을 수修, 행할 행行’ 의 수행修行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보살행입니다. 이웃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 곧 수행이고 보살행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행보리심, 바로 보살행입니다. 그리고 행의 궁극적인 종점은 깨달음입니다. 신信, 해解, 행行 이란 말도 있습니다. 믿고, 이해하고, 행하면 그행의 결과 깨달음에 이른다는 겁니다. 주의할 것은 깨닫고 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완성이 깨달음이라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행行 속에는 이미 깨달음이 들어있습니다. 마치 과일 속에 씨앗이 들어있듯이.


상징적인 이야기지만 부처님의 전생을 보면, 부처님은 사람 몸 뿐 아니라 짐승의 몸을 받기도 하면서 이웃 중생들을 위해 얼마나 많은 헌신을 했는지, 보살행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50년 전 절에 들어왔을 때 <팔상록>과 <십지인행록> 같은 책들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전생에 어떤 보살행을 했으며, 보리심을 어떻게 행햇는가 하는 이야기들이 여기 담겨 있습니다.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내용들이어서 처음 절에 들어온 사람들로서는 쉽게 믿기 힘듭니다.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 상징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들속에는 깨닫고 나서 행하는것이 아니라 행의 결과가 깨달음에 이르게 함이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모시는 곳이 팔상전입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건인 통도상通道相이 팔상 중에는 없습니다.


첫 번째, 도솔내의상에서는 도솔천에서 흰 코끼리를 타고 엄마 태몽으로 들어갑니다. 두 번째, 비람강생상은 4월 초파일 룸비니에서 탄생한 것이요, 이어서 네 성문 밖에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본 사문유관상, 왕궁을 넘어 출가한 유성줄가상, 설산수도상, 보리수 아래서 여러 악마들에게 항복받는 수하항마상입니다. 여기에 그려져야 할 그림이 바로 통도상이건만 녹야원에서 법을 전하는 녹원전법상으로 연결되고 마지막으로는 열반하신 쌍림열반상이 그려집니다.


어째서 가장 중요한 통도상이 빠졌을까, 의문을 갖이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수행과정 속에 이미 깨달음이 들어 있다는 점을 기억해 보십시오. 따로 통도상을 넣을 필요가 없는 겁니다. 왜냐하면 본래 성불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성불인데 왜 새삼스럽게 닦아야 합니까? 닦지 않으면 오염되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승가에서는 내가 아직 깨닫지 못했는데 어떻게 남을 제도할 수 있는가 합니다. 내가 아직 눈을 뜨지 못했는데 어떻게 남을 눈뜨게 하겠는가 하는 가설에 속지 마십시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며 영원히 깨닫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이기 때문입니다.


지장보살의 원을 생각해 보십시오. 고통받는 모든 중생을 다 건진 다음에 내가 성불하겠다, 한 중생이라도 고통 받는 중생이 있는 한 성불하지 않겠다는겁니다. 지장보살의 그런 서원 안에 이미 깨달음의 씨앗이 들어있습니다. 지장 보살 같은 분을 성불을 원하지 않는 보살이라 하여 비증보살이라고 합니다.


종교학자들은 불교를 깨달음의 종교라 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깨달음은 어디서 옵니까? 어느날 갑자기 옵니까? 쉼이 없는 생의 축적이 마침내 눈을 뜨게 하는 겁니다. 이것은 꽃이 피는 소식과 같습니다. 꽃은 어느 날 갑자기 피지 않습니다.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의 인고의 세월을 겪으면서 안으로 꽃을 이루기 위해 무한한 노력을 합니다. 꽃망울이 맺혔다가도 한참 있다 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한 송이 꽃이 피기까지는 그와 같이 무한한 인고의 노력이 따릅니다. 한 인간이 형성되기까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아침에 갑자기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경에는 무한한 정진이 필요합니다.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본래 성불, 본래 다 갖추어진 겁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갖추려 노력하는가 하면 닦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교수행학에서는 ‘신해행증(믿고 이해 하고 행하고 증한다)’ 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 행증’은 행의 완성이란 의미입니다만 행의 완성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중생계가 다해야 완성이 있는 겁니다. 한 중생이 있는 한 완성이란 이상일 뿐 있을수 없는 겁니다.


행의 구경究竟이 곧 깨달음이란 것은 수행의 이 본래적인 자기로 돌아간다는겁니다. 다시 처음 이야기한 샨띠데바의 법문을 같이 암송해 봅시다.




세상의 모든 행복은


남을 위한 마음에서 오고,


세상의 모든 불행은 이기심에서 온다.


하지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리석은 사람은


여전히 자기 이익에만 매달리고,


지혜로운 사람은 남의 이익에 헌신한다.


그대 스스로 그 차이를 보라.


내 자신이 어리석은 사람인지 혹은 지혜로운 사람인지 스스로 판단하라는 소식입니다. 이번 여름 안거 기간에 내가 어떤 보살행을 할 것인지 각자 오늘 이 자리에서 스스로 원을 세워보십시오. 사소한 가정적인 일이건 사회적인 일인거 혹은 이웃을 위한 일이건, 크고 작건 간에 목료를 설정해야 합니다. 이번 여름 석 달 안거기간 동안 어떻게 보리심을 행할 것인가 원을 세워보십시오. 그 원의 힘으로 이번 여름이이 자기 자신의 생에서 두고두고 기억할만한 그런 여름으로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런 좋은 여름이 되기를 빌면서 이만 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