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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5-06-17

    부처님은 어디서 오시는가 ---- 부처님 오신날 법문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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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은 어디서 오시는가


이글은 지난 5월 15일(음력4월8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 설해진 ‘부처님 오신날’기념 법정스님 법문을 녹취,정리한것입니다.




오늘이 무슨 날인데 이렇게 요란하지요? 부처님 오신날이라 그렇지요?


하지만 오늘은 부처님만 오신 것이 아니라 꽃도 오고, 잎도 오고, 새도 함께 온 날입니다.


보통 아무개 생일, 아무개 탄생일이라 하는데,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이름붙인 데는 불교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만난 인연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름도 낯도 모르는, 생판 남남이지만 ‘오늘’이 있었기에 이렇게 만난 겁니다. 한 사람의 삶의 영향력이란 이런 겁니다. ‘오늘’이 없다면 이런 절도 없고, 오늘 이런 자리도 마련될 수 없습니다. 부처님 오신날이 있었기 때문에 이 화창한 봄날 우리가 이런 모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럼,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부르는데 부처님이 어디서 오셨는지 아십니까?


전설적인 이야기로는 도솔천 내원궁에서 오셨다고 이야기합니다. 고대 인도 사람들 생각에 착한 사람들이 태어나 기쁨을 누리는 곳이 도솔천입니다. 또는 '지족행‘라는 말로도 답합니다. 산이 높은 에 도솔암이라는 암자가 많습니다. 도솔천에서 온 말로 수시타데바란 말의 음어로 그 뜻을 옮기자면 지족암이라고 합니다. 즉 만족할줄 아는 것이 가장 높은 경지라는 소식입니다.


여기서 말한 어디서 왔다는것은 어떤 출발지나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부처님이 어디서 오셨는지. 꽃과 잎들과 새들은 어디서 왔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석가여래의 ‘여래’란 말에도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리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다른 말로 수행을 완성한 사람, 깨달은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진리에서 온 사람, 진리를 따라 이 세상에 와서 진리를 보인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대승불교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중생을 구제하러 오신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부처님에게도 10가지 별명이 있습니다.


이를 여래십호라 합니다. 여래는 총칭이고,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 세존 이렇게 열 가지입니다. 모두 부처님의 덕을 기려서 부르는 이름들입니다.


첫째로 응공이라 함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공양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른말로 아라한이라도 하는데 나한전을 응진전이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알수 있듯이 응공에서 온 말입니다.


두 번째로 정변지는 바르고 온전하게 진리를 깨달은 분이라는 뜻으로 정등각이라 표현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명행족, 즉 지혜와 행이 갖추어진 어른 또는 언행이 온전한 분이라는 뜻입니다.


네 번째는 선서라 함은, 미혹의 세계를 잘 넘어 다시 돌아오지 않는 분, 다시 말해 생사에 벗어난 분이라는 뜻입니다.


다섯 번째의 세간해란 말 그대로 세간과 출세간의 일을 잘 아시는 분이란 의미이며 여섯 번째 무상사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분, 그 이상이 없는 분이라는 별칭입니다. 일곱 번째 조어장부는 중생을 잘 조복하여 해탈로 이끄는 분이란 뜻이며, 여덟 번째 천인사는 천상과 인간의 스승이란 의미입니다. 아홉 번째의 불이란 깨달은 사람이란 뜻이며 마지막으로 세존이라 함은 수많은 덕을 갖추어 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와 같이 여래십호는 부처님의 덕을 나타낸 이름입니다. 물론 부처님 자신이 그런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니고 제자들, 후세 사람들이 부처님의 덕을 기려서 붙인 이름입니다.


우리도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처님처럼 자신의 덕을 기리는 별명을 몇 개쯤 가질 수 있어야 됩니다. 가령 아주 착하디 착한 사람을 ‘법 없이도 살아갈 사람’이라고 표현합니다. 또 부정적인 의미로는 놀부 같은 놈이라드니, 구두쇠, 살살이, 능구렁이 같은 별칭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평소 인품을 보고 느낀 대로 이웃들이 불러주는 것입니다. 여러 입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불려지는 것이 그의 별명이 된 것입니다.


다시 한번 물어봅니다. 부처님은 어디서 오셨습니까? 무엇하러 오셨습니까?


남의 물음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각자, 자기 자신의 물음으로 물어보십시오. 남의 일이라 결코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 자신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물음 속에 부처님이 오신 뜻이 들어 있습니다. 흔히들 ‘자비심이 곧 여래’라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까. 이 구절은 <열반경 범행품>에 있습니다.


“모든 보살과 여래는


자비심의 근본이다.


보살이 자비심을 기르면


끝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


누가 무엇이


온갖 선행의 근본이냐고 묻거든


자비심이라고 대답하라.


자비심은 진실해서 헛되지 않고,


착한 일은 진실한 생각에서 일어난다.


진실한 생각이 곧 자비심이고


자비심이 곧 여래다.“




어떤 제자의 물음에 부처님 자신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부처님이나 여래를 거창하게 생각하지 맑고 자비심 그것이 부처임을 알라 하신 것입니다.


‘부처님이 어디서 오셨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도솔천에서 부처님이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바로 자비심에서 오셨다는 겁니다.


무엇하러 오셨는가? 그 자비심을 실현하기 위해서 오신 겁니다.


절이건 교회이건 가시면 가끔 물어보십시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무엇하러 왔는가?


맹목적으로 초파일 이니깐 절에 가서 절하고 불 켜는 것은 별의미가 없습니다.


불교를 가르켜서 종교학자들은 ‘구도의 종교’라 합니다. 묻는 종교라는 겁니다. 물음을 통해서 잠든 자아를 일깨웁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어느날 새벽별을 보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는 것만이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새롭게 알아차리는 겁니다. 무명의 구름에서 벗어나 맑은 하늘을 스스로 체험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런 물음을 지녀야 합니다.


우리들 자신이 신앙생활을 하는 불자로서 자비심을 얼마만큼 지니고 있는지, 그 자비심을 일상생활에 어떻게 실행하고 있는지에 따라서 우리들 자신이 몇 점짜리 불자인지 그 점수가 매겨집니다.


스님이건 일반 불자이건, 불교에 귀의한지 오래되었건, 몇 해 되지 않았건 하는 것은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부처님 제자로서 과연 얼마만큼 자비심을 지니고 있느냐, 그 자비심을 일상생활 속에 이웃에게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냐가 문제입니다.


각자 점검하여 보십시오. 나는 몇점짜리 불자인가 스스로 점검해 보세요.


이 어지러운 세상, 이 살벌한 세상, 이 막된 세상을 어떠한 힘으로 구할수 있겠습니까?


자비심만이, 사랑만이 우리들 자신을 일으켜 세우고 이웃을 구하고 세상을 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종교에서 한결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에 의해서 자비에 의해서 스스로도 구원받고 이웃도 구원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핵무기로써 세상을 제압하고 구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날 핵보유 국가들의 그 오만은 전체를 내다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핵무기가 있다고 으스대는 것은 하나의 무지의 소산입니다. 무지는 생사윤회의 근원입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살만큼 살다가 하직할 때 내게 남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본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은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될 겁니다. 본인 스스로가 평가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남은 사람들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생전에 그가 얼마나 많이 이웃들에게 또는 세상에 자비심을 베풀었는가, 선행을 했는가, 덕행을 쌓았는가에 의해서 평가됩니다. 관에 못을 박아봐야 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들은 이 풍진 세상을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나만 사는 세상이 아닙니다. 내 자신이 착하게 살면 이웃에게 그 덕을 나눕니다. 내 자신이 착하게 살지 못할 때는 이웃에게 근심,걱정,피해를 끼칩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십시오. 남을 의식하지 않고 저마다 자기 밖에 모르게 때문에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습니다. 자기 혼자 살아가는 세상이라면 자기 밖에 몰라도 상관없을 겁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함께 사는 곳이기 때문에 서로가 상대방을 배려해야 합니다. 가정이건 사회건 국가건 함께 사는 이웃을 배려해야 됩니다. 자기 밖에 모르는 그런 세상은 바람직한 세상이 아닙니다.


결국 한 생애에서 무엇이 남습니까. 평소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이웃에게 어떤 덕을 베풀었는지, 어떤 선행을 했는지 이것만이 자산으로서 남습니다. 그 밖의 것은 다 허무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자비심이 곡 여래라는 말을 거듭 명심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내 자신은 어디서 왔는지, 무엇하러 왔는지 거듭거듭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물음을 지니고 있으면 결코 헛된 길을 밟지 않습니다.


부처님 오신날 두루 복 받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