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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5-07-23

    맑고 향기롭게 10년을 돌아보며....

본문

2003년 맑고 향기롭게 10주년 기념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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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라는 말에 실감이 갑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모임이 어느새 10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세상은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어지럽게 변하고 있습니다.


거리가 단축되고 시간이 팽창되어 앉은 자리에서 세상의 움직임을 한 눈으로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리는 날로 위태로워 갑니다.


경제와 개발 논리에 짓눌려 생물의 삶터인 생태계가 말할 수 없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한 해에 수백 종의 생물들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답니다.


봄이 와도 철새인 제비가 이 땅에 찾아오지 않는 그런 환경이 되었습니다.


다른 생물에게 일어난 일은 곧 우리 인간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날로 혼탁하고 삭막하고 살벌해 가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본래 청정한 심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자각에서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의 모임이 싹텄습니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뜻하고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인 메아리입니다.


베푼다는 말에 저는 저항을 느낍니다. 베푼다는 말에는 수직적인 주종관계가 끼어 듭니다.


시혜자와 수혜자, 곧 은혜를 베푸는 사람과 그 은혜를 받는 사람이 설정됩니다.


진정한 은혜는 수직적이지 않고 수평적이어야 합니다.


자기 것이 있어야 베풀 수 있는데 본질적으로 자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올 때 우리는 빈손으로 왔습니다. 갈 때 또한 빈손으로 갑니다.


다만 평소에 익히고 쌓은 업(業)만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릅니다.


현재의 소유는 한 때 맡아서 관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베푼다는 말은 당치 않습니다.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나눔입니다.


베품은 수직적이지만 나눔은 수평적입니다.


나눔으로써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사실 개인의 존재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환경과 상황에 한정된 국지적인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개인이 나눔을 통해서 그 존재의미가 밖으로 확산됩니다.


이웃과 나눔으로써 자신을 보다 깊고 넓은 세계로 이끌어갑니다.


자신을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으로서 성숙해집니다.


나무와 돌, 흙과 시멘트, 유리와 쇠붙이 같은 것들은 한낱 자재(건축자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자재가 어떤 건축물에 쓰일 때 자재는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습니다.


개인의 존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짐으로써 보다 성숙한 인간이 됩니다.


국지적인 개인이 전체적인 인간으로 바뀝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이 일에는 낱낱이 그 이름을 들출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맑고 향기로운 뜻이 결집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다달이 성금을 보내주시는 분들,


결식 이웃을 위해 집안일을 제쳐 두고 매주 밑반찬을 마련해 주시는 자원봉사 회원들,


그리고 각 지역모임에서 사재를 들여가며 어려운 이웃을 꾸준히 보살펴 오시는 분들.


이 밖에도 드러나지 않게 돕는 자비의 손길들,


특히 중앙모임에서 10년을 하루 같이 애써 준 문수행 김자경 실장의 헌신적인 노고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과 치하를 드립니다.





사실 지금의 길상사가 생기게 된 것도 맑고 향기롭게의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귀찮은 일에 얽혀들기 싫어 절을 만들자는 시주의 뜻에 몇 해를 두고 사양해 왔었습니다.


전에는 종로에 사무실을 빌려서 일을 해왔는데, 이 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구체적인 도량이 있어야 되겠기에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절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 일에는 길상사 초대 주지를 지낸 청학스님과 길상회 회원들,


현재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이사와 감사 여러 분들의 숨은 공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이 일을 뒷바라지하면서


문득문득 '내 자신은 과연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고 있는가?'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이 물음을 화두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마침내 온 법계가 청정해진다'는 이 가르침을 제 스스로 실현하기 위해 발원합니다.


또 아침마다 기도 끝에 이와 같이 축원합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이 일에 동참한 분들이 저마다 맑고 향기로운 나날을 이루게 하소서.


그리고 이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는


일마다 장애 없이 맑고 향기롭게 회향하게 하소서.'


이 글을 읽으실 여러 분들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를 통해서 만난 이 시대의 인연 있는 가까운 이웃입니다.


열 돌을 맞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뜻을 다져 우리들 마음과 세상과 자연이 보다 맑고 향기롭게 되도록


우리 함께 꾸준히 정진하십시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봄, 맞이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