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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0-09-14

    움켜잡지 말고 쓰다듬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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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켜잡지 말고 쓰다듬으라


法頂(회주스님)


처서를 전후로 더위를 씻어가는 비가 몇 차례 오락가락 하


더니 바람결이 많이 서늘해졌다. 밤으로는 풀벌레 소리가


요란하고 반딧불이가 어지럽게 날아다닌다. 뒤꼍에서 산자


두 떨어지는 소리가 함석지붕에 울릴 때마다 반사적으로 움


찔거려진다.


바람결이 서늘해지자 어느새 하늘도 저렇게 높아졌다.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의 귀는 바람결을 타고 날로 예민해간다.


팽팽하게 당겨진 현악기의 줄처럼 슬쩍 스치기만 해도 저


안에서 깊은 소리가 울려나올 것 같은 그런 태세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무더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우리가 살아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존재만이 더위와 추


위를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삶이란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행운이라고 한다.


순간순간 살아 있는 존재로서 아침이면 밝은 햇살을, 저녁


이면 어둠을 맞이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이 세상이 계속


해서 우리를 향해 무어라고 말을 걸어온다. 그러므로 삶은


우리가 조금씩 아껴가면서 꺼내놓고 싶은 보배요, 행운이


다.


지난 여름 그 무더위 속에서도 우리가 누린 행운의 하나


는 반세기가 넘게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의 일부가 한때나


마 부둥켜 안고 통곡을 할 수 있었던 만남이다. 그것은 단


순한 행운이 아니라 비극적인 행운. 개인의 의지에서가 아


니라 미국과 소련의 전후 이해관계에 의해 자행된 분단이


기 때문이다.


이 비극적인 행운 속에서 우리가 함께 눈물을 지으면서 거


듭 되새긴 것은 '어머니의 존재'였다. 70이 넘은 자식이 어


머니 앞에서 어린애처럼 통곡을 하고, 집을 나간 자식을 자


나깨나 애타게 기다리며 50년을 참고 견뎌온 그 인고의 세


월에 주름 잡힌 어머니의 모습은 참으로 거룩하게 다가섰


다.


한 몸에서 떨어져 나온 자식에게 어머니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생명의 뿌리이다. 어머니야말로 우리가 기대고 의지


할 인간의 영원한 대지다. 이와 같은 어머니를 아침 저녁


가까이서 모실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행운임을 고맙게 여


겨야 한다.



세상은 지금 어지럽게 변하고 있다. 정보화 사회의 인터


넷 보급으로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있다. 인터넷


에 맛을 들인(어쩌면 걸려든) 사람들은 지루하게 기다릴 필


요가 없어졌다. 찾고자 하는 자료들을 앉은 자리에서 재빠


르게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들은 인간적인 접촉보다 가상공


간에서 이루어진 접속을 보다 구체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감정이 없는 컴퓨터 앞에 홀로 앉아 있다. 둘레에


는 삶의 율동과 지혜, 인간미와 흙냄새 등 현실세계는 존재


하지 않는다. 추상적인 지식과 정보와 가상공간이 있을 뿐


이다. 차디찬 정보는 있어도 따뜻한 삶의 실존이 없다. 이


것이 우리 시대의 단적인 현상이다.


편리한 연장이기 때문에 나도 한때는 컴퓨터를 다루어볼


까 했었다. 그러나 보다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고자 하는


내 삶의 규범에 맞지 않아 한때의 호기심을 거두어 들였다.


「장자」외편 '천지(天地)'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공자


의 제자 자공이 한수 기슭을 지날 때 한 노인이 항아리에


물을 길어 밭고랑에 붓는 힘든 일을 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자공이 물었다.


"어째서 양수기를 쓰지 않습니까?"


노인의 대답은 이러햇다.


"양수기를 쓰면 편리하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


러나 한 번 기계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거기 기심(機心)이


일어납니다. 기계에 마음이 팔리면 순박하지 못하고, 순박


하지 못하면 정신이 안정을 이룰 수 없어 마침내 도를 지


킬 수 없습니다. 나는 양수기를 다룰 줄 몰라서가 아니라


하지 않는 것이오."


이 말을 듣고 자공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 채 아무말도


못했다.



지난 여름에 읽은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에세이스트인 피


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아직도 좋은


여운을 남기고 잇다.


모든 것이 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에서도 그는 느리게 살 필


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느림'은 개인의 자유를


일컫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느리게 사는 지혜는 첫째 빈둥


거릴 것. 즉 자기만의 시간을 가지라고 한다. 둘째 들을


것. 신뢰할 만한 다른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한


다. 셋째 권태. 무의미할 때까지 반복되는 것을 받아들이면


서 취미를 가지라는 것. 넷째 꿈을 꿀 것. 자기 안에 희미


하지만 예민한 하나의 의식을 자리잡아 두라고 한다. 다섯


째 기다릴 것. 가장 넓고 큰 가능성을 열어두라는 것이다.


여섯째 마음의 고향. 즉 존재의 퇴색한 부분을 간직해두라


고 그는 말한다.


한가로이 거니는 것, 그것은 시간을 중단시키는 것이 아니


라 시간에 쫓기지 않고 시간과 조화를 이루는 행위라는 것


이다. 다시 말하면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움이다.



그는 또 이런 말도 하고 있다.



"소유가 우리를 괴롭히는 까닭은 그것이 우리에게 궁핍을


모르게 하고,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부풀게 해주기 때문이


다. 재물이 우리가 할 일을 대신하게 될 때 우리는 스스로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일찍이 동양의 현자들이 가르친 바 있는 사상을 그는 현대


의 언어로 서술하고 있다. 동양의 지혜가 그 현지에서는 무


시되거나 소홀히 다루어지고 있는데, 서양의 지성이 이를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우리는 삶을 지혜를 밖에서만 찾으


려고 한다.


"살짝 스치기만 할 것이지 움켜잡지 말라. 움켜잡는 순간


그대는 복잡한 삶 속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