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법정(法頂)
가을바람 불어오니 일손이 바빠진다. 우선 이 구석 저 구
석에 놓인 여름의 부스러기들을 치워야 한다. 드리웠던 발
을 걷어들이고 투명한 가을 햇살에 새로 창문을 바른다. 서
리가 내리기 전에 고추밭에 남은 끝물 고추도 마저 딴다.
호박도 거두어들인다. 그리고 이제는 날마다 군불을 지펴
야 하므로 나뭇간에 장작과 땔감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뜰가에 있는 몇 그루 소나무와 단풍나무의 가지치기도 한
다. 그 공안 왕성하게 자라 한데 얽힌 가지들을 따내어 수
형을 잡아 준다. 폭우로 밀려 나간 개울가 디딤돌을 물 속
에 들어가 끌어 올려 제 자리에 놓는다.
아무리 오두막일지라도 집을 한 채 지니고 살려면 이런 일
은 감수해야 한다. 이것이 또한 사람 사는 일 아니겠는가.
태풍이 지나간 후 한 노스님이 사는 산 너머 일이 궁금해
서 며칠 전 찾아 나셨다. 영동 산간지방은 눈과 비는 많이
내려도 바람 피해는 별로 없다고 한다. 높은 산이 첩첩이
싸여 있기 때문에 제 아무리 거친 바람도 기를 펴지 못한
다.
"스님, 계세요?"
서너번 인기척을 냈지만 아무 대꾸도 없었다. 밖에 나가시
고 안 계신가 싶어 뒤꼍으로 돌아서니 저 언덕 위 소나무
아래 정좌하고 계셨다. 한 손에 단주를 들고 앉아 있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나는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소나무 아래 반석에 방석을 깔고 선정에 든 모습이 내 눈
에는 거룩함보다 아름다움으로 비쳤다. 수행자가 아무 잡
념 없이 무심히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은 참으로 천연스럽고
아름답다. 선원에서 여럿이 한 방에서 참선하는 모습도 보
기 좋지만 거기에는 긴장감이 서려 아름다움은 덜하다. 여
럿이 홀로의 그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따금 서울 광화문 거리에 있는 교보빌딩 5층에 올
라가 치료를 받는 단골 치과가 있다. 지정석은 아니지만
맨 안쪽에 있는 방이 내게는 익숙하다 창으로는 왼쪽으로
이순신 동상이 발 아래로 내려다 보이고 멀리 인왕산이 들
어온다. 의자에 앉으면 정면에 뭉크가 그린 로댕의 '생각하
는 사람'이 걸려 있다.
파리의 로댕미술관에서 생각하는 사람의 실물을 보기도 했
지만 뭉크가 그린 이 생각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나는 우
리 '미륵반가사유상'이 겹쳐서 떠오르곤 한다.
똑같이 생각하는 혹은 명상하는 사유상을 다루고 있는데
동서양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로댕의 것은 생각하는 사람
이라기보다는 고뇌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할만큼 그 모습이
어둡고 무겁다.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그의 고뇌가 어둡고
무겁게 내게 묻어오는 것 같아 내 기분 또한 가볍지 않다.
내 편견일까.
그러나 미륵반가사유상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불상이 머금은 잔잔한 그 미소가 내게 옮아오는 것 같아 마
음이 가볍고 그윽해 진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는 전혀
다른 생각하는 모습이다.
똑같은 사유를 주제로 다루고 있으면서도 동양과 서양은
그 표현방식이 이와 같이 다르다. 문화의 차이란 이런 것
이 아닐까 싶다.
뭉크의 그림이 걸린 그 방에서 치료를 마치고 원장인 윤박
사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더니 '참 그렇군요'라고 공감했다.
독일의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일본 교토에 와서 고류지(廣
隆寺)에 모셔진 미륵반가사유상을 보고 크게 감탄한 바가
있다. 일본에서 국보 제 1호인 이 미륵반가사유상은 백제
사람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한다.
야스퍼스는 이렇게 술회한다.
‘나는 지금까지 철학자로서 인간존재의 최고로 완성된 모
습으로 여러 가지 모델을 접해봤다. 옛 그리스 신들의 조각
도 보고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수많은 뛰어난 조각의 상도
보아왔다. 그러나 그것들은 완전히 초월하지 못한 지상적이
고 인간적인 체취가 남아 있다.
그 어떤 것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지상적인 감정의 자취
를 남긴 세속적인 표현이지 진정한 인간실존의 저 깊숙한
바닥에까지 도달한 자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이 미륵반가사유상에는 완성된 인간실존의 최고 이
념이 남김없이 표현되어 있다. 그것은 지상의 시간적인 온
갖 속박에서 벗어나 도달한 가장 청정하고 원만한 그리고
보다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오늘에 이르도록 수십년 철학자의 생애를 살아오면
서 이처럼 인간실존의 참으로 평화스러운 모습을 표현한 예
술품을 일찍이 본 적이 없다. 이 불상은 우리 인간이 지닌
마음의 영원한 평화를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현하고 있다.’
야스퍼스가 이와 같이 감탄해마지 않는 사유상은 다름 아
닌 신라나 백제 때 우리 선인들의 모습이다. 그 후손인 현
재의 우리들 모습은 어떤지 한 번 돌이켜 볼 일이다. 오늘
우리들의 얼굴 모습을 보고 옛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 것인
가.
현대 정신의학에서는 '영상치료'라는 것이 있다. 자비스럽
고 온화한 모습을 항상 가까이 대함으로써 거칠어진 정신
과 불안정한 정서를 치유하는 새로의 의술이다.
그러나 뜻이 있는 사람은 어떤 대상을 보고 치유할 게 아니
라 스스로 자비와 온화를 만들어내야 한다.
나무 아래 홀로 앉아 무심히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이
와 같은 일상적인 집중과 정진이 아름다움을 만들고 자비스
럽고 온화한 모습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찾고자 하는 것은 앞서 간 이들의 발자취가 아니
라 그 분들이 찾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가 찾아야 할 것은 외부에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이미 존
재해 온 우리 자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