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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1-08-06

    여름 살림살이

본문

며칠 전에 만난 친지가 이 여름을 어떻게 지내느냐고 물었다. ‘중노릇 항상 그렇지요’하고 대답했지만 돌아오는 길에 이 여름을 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았다.

자고 일어나는 일과 조석 예불은 철이 바뀌어도 늘 한결같다. 산중도 한낮으로는 더우니까 맨발에 헐렁한 옷을 걸치고 느릿느릿 게으르게 움직인다. 때로는 묵은 서화(書畵)를 들추기도 하고 예전 수행자의 자취를 읽으면서 현재의 자신을 그 거울에 비쳐보기도 한다.

밤으로는 불을 끄고 물것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불단에 밝힌 작은 등잔 말고는 아예 불을 켜지 않는다. 어둠이 무료해지면 카세트 테이프에 실린 명상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최근 대원사 티베트 박물관에 갔다가 거기서 구해온 〈옴 마니 반메 훔〉 명상음악을 즐겨 듣는다. 염불소리가 단조롭지 않고 음악성이 뛰어나 이 음률에 귀를 모으고 있으면 저절로 명상에 잠길 수 있다. 소리와 빛 가운데 평안이 있음을 실감한다.

산중에 비가 내리면 밭에 나가 풀 메는 일도 할 수 없으니 자연 지붕 밑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 비 오는 날 창문 아래 앉아 서화집을 펼쳐드는 일도 산중생활의 잔잔한 여백일 수 있다.

〈소치실록(小痴實綠)〉을 10수년만에 다시 펼쳐보는 데 그 감흥이 새롭다. 허소치는 초의 선사와의 만남을 통해서 그의 예술세계가 벽지의 궁벽함을 벗어날 수 있었다. 초의선사의 주선으로 추사 김정희 문하에서 안목을 틔우고 문기를 길렀다. 그래서 칭찬에 인색한 추사로부터 압록강 동쪽에는 이만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격찬을 받기에 이른다.


〈소치실록〉에 실린 여러 그림 중에서도 부채에 그린 ‘선면산수화(扇面山水畵)’를 나는 좋아한다. 그가 말년에 살던 운림산방(雲林山房)과 그 둘레의 풍경을 그린 이 그림은 여느 부채그림과는 달리 여백이 없이 그림과 화제시로 가득하다. 추사의 글씨체를 그대로 익힌 화제시와 그림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1976년 김영호의 편역으로 서문당에서 간행한 〈소치실록〉에는 이 그림이 먹으로만 되어 칙칙한 느낌이었다. 원화는 서울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고 하는데 최근 이레에서 펼쳐낸 〈원형의 섬, 진도〉(허용무 사진, 김훈 글)에 채색으로 된 원화의 복사본을 수록하여 이 그림이 지닌 품격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중국 나대경(羅大慶)의 화제시(畵題詩)는 이 선면산수화와 너무도 잘 어울린다. 몇 구절 인용해 보자.

‘내 집은 깊은 산골에 있다. 매양 봄이 가고 여름이 다가올 무렵이면 푸른 이끼가 뜰에 깔리고 낙화는 길섶에 가득하다. 사립문에는 찾아오는 발자국 소리 없으나 솔 그림자는 길고 짧게 드리우고 새소리 높았다 낮았다 하는데 낮잠을 즐긴다.

이윽고 나는 샘물을 긷고 마른 솔가지를 주어다 차를 달여 마신다. 그리고 조용히 산길을 거닐며 송죽을 어루만지기도 하고 사슴이나 송아지와 더불어 풀숲에서 뒹굴기도 한다. 앉아서 흐르는 시냇물을 구경하고 시냇물에 발을 담그기도 한다.

해가 기울어 지팡이에 기대 사립문 아래 섰노라면 지는 해는 서산 마루에 걸려 노을이 붉고 푸른 색깔이 수만 가지로 변한다. 이 때 소를 타고 돌아오는 목동들의 피리소리에 맞춰 휘영청 둥근 달이 앞 시내에 돋아 오른다.’

이 어느 세상 풍경인가. 산업화와 도시화가 되기 전 우리가 흙을 가까이 하며 농사를 짓던 바로 그 시절, 시골 어디서나 보고 즐길 수 있었던 한가로운 풍경 아닌가.


못가에 홀로 앉아 있다가

물 밑의 스님을 우연히 만나

말없는 웃음으로 서로 보면서

그를 알고 말해도 대답이 없네.


고려 시대 진각 혜심선사의 ‘그림자를 보고’라는 시다. 맑은 물 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 느낌을 나타낸 글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그림자를 지니고 살아간다. 빛을 받아야 그 그늘에 거무스레하게 나타나는 형상. 맑은 물이나 거울에 비치기도 하는 자신을 닮은 그 형상.

자신의 그림자를 이끌고 한평생 살아온 자취를 이만치서 되돌아본다. 물론 그림자는 실체가 아닌 허상이다. 그러나 그림자 없는 실체는 또 무엇인가. 그 실체는 그림자를 지니지 않은 그런 실체는 존재의미를 잃는다.

먹고 마시고 입고 걸치고 머물고 나다니면서 사는 우리는 알건 모르건 간에 수많은 사람들의 은혜와 보살핌 속에서 살아간다. ‘그림자 노동’이란 말이 있는데 집안에서 식구들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보살피고 거들며 헌신하는 일을 가리킨다.

내가 절에 들어와 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은혜와 보살핌 속에서 살아왔는지. 요즘에 이르러 새삼스레 부쩍 마음이 쓰인다. ‘그림자 노동’의 은혜 속에서 살아온 나날들이었다. 그 대신 내가 세상에 끼친 게 얼마나 될까. 받은 것에 견주면 백분의 하나, 천분의 하나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무겁고 무겁다.

말없는 웃음으로 서로 보면서

그를 알고 말해도 대답이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