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옛 시조에 이런 노래가 있다.
청산도 절로절로 녹수도 절로절로
산절로 수절로 산수간에 나도 절로
이 중에 절로 자란 몸이 늙기도 절로절로.
푸른 산도 자연이고 흐르는 물도 자연이다. 산도 자연이고 물도 자연, 이 산과 물 사이에서 살아가는 우리도 또한 자연 그것이다. 이런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자란 몸이니 늙기도 자연에 맡기리라는 노래다.
자연을 읊은 수많은 시조 중에서도 함축미가 뛰어난 노래다. 요즘처럼 자연과 그 질서를 배반하고 반자연적으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시퍼런 법문이 될 것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되찾으려면 이와 같은 자연의 순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산이 깎이어 허물어지고 숲이 사라지고 강물이 말라붙고 들짐승과 새들이 사라진 그 빈자리에 사람만 달랑 남아서 살 수 있을 것인가?
자연이 소멸된 황량한 공간에서 컴퓨터와 TV와 가전제품과 자동차와 휴대전화와 오락기구만을 가지고 사람이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푸른 생명체는 없고 무표정한 도구만이 들어선 환경에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늙고 제 명대로 살다가 익은 열매가 가지에서 떨어지듯이 자연스럽게 죽을 수 있을 것인가.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5백년 전 이 땅에서 살다 가신 옛 어른의 노래를 되새기는 뜻이 여기에 있다.
이 시조는 조선조 현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하서(河西) 김인후가 지은 것. ‘청구영언(靑丘永言)’에는 송시열의 작품이라고 했지만 ‘하서집’에 「자연가(自然歌)」라는 한시가 실려 있는 걸 보아도 김인후가 읊은 노래임이 분명하다.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90년만의 가뭄이라고 해서 저수지마다 바닥을 드러내고 댐의 물이 줄어 그 저수량이 얼마밖에 남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불안했다. 먹을 물이 달려 차로 실어나르고 밭작물이 타들어가고 갈라진 논바닥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물을 대느라고 농촌마다 땀을 흘렸다. 물 귀한 줄을 거듭 실감하게 되었다.
이런 정성에 감응이 있었는지 방방곡곡에 단비가 고루 내렸다. 채소와 벼포기가 기운을 되찾고 산과 들녘에 생기가 넘친다. 자연은 스스로를 조절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가물면 비를 내리고 폭우가 내려 홍수가 나면 날이 개인다. 사람들이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자연의 은혜를 잊지 않는 한 자연은 절로절로 되어간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 지구에서 인류가 살아온 자취다.
그러나 요즘에 와서 지구 곳곳에 기상이변이 일어나 절로절로의 그 흐름이 끊어진 것은 지구를 의지해 살아가는 인간들 탓이다. 한 마디로 인간들이 무지해서, 너무도 영리하고 영악해서다. 지구를 끝없이 허물고 착취하고 더럽혀 절로절로의 자정능력마저 빼앗아버렸기 때문이다.
지난 번 가뭄 때 우리는 실감할 수 있었다. 물이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라는 사실을. 물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함부로 퍼쓰고 흘려보내고 더럽혔던 것이다. 90년만의 가뭄은 물의 은혜에 대해서 고마움을 일깨우고 함부로 다루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한 우주적인 배려라고 생각된다.
노자는 말한다.
‘이 세상에서 물보다 더 부드럽고 겸손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딱딱한 것, 사나운 것에 떨어질 때는 물보다 더 센 것은 없다. 이와 같이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 한 방울 한 방울의 물이 모여 강을 이루고 댐을 이루어 동력을 일으킨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이 말은 자연이 지닌 모성적인 그 저력을 뜻한다.
개울가에서 나는 인간사를 배우고 익힐 때가 더러 있다. 깊은 산 속이라 어지간한 가뭄에도 개울물은 그리 줄지 않는다.
개울물은 밤이고 낮이고 항상 흐르고 있지만 언제나 그곳에 그렇게 있다. 항상 그곳에 있어 어느 때나 같은 물이지만 순간마다 새로운 물이다.
시간도 흐르는 개울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제도 나는 이 개울가에 나와 있었다. 그러나 어제 그 때는, 그 시간은 어디로 갔는가? 또한 그 때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는 것은 새로운 나다. 개울물이 항상 그 곳에서 그렇게 흐르고 있어 어느 때나 같은 물이면서도 순간마다 새로운 물이듯이 우리들 자신의 ‘있음’도 그와 같다.
그러니 흐르는 물처럼 늘 새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구름이 되고 안개가 되어 뜨거운 햇살을 막아주는 삶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흰눈이 되어 얼어붙은 인간의 대지를 포근하게 감싸주고 서리가 되어 세월의 변화를 미리 알려 주기도 해야 한다. 비와 이슬이 되어 목마른 대비를 적셔 주면서 풀과 나무와 곡식과 과일들을 보살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노자는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고 했다. 물의 덕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 남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머문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깝다고 한 것이다.
가뭄 끝에 내린 단비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면서 물보살의 은혜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