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저녁으로 선들바람이 불어온다. 산빛이 바뀌고 있다. 초록이 바래져 갈색이 조금씩 늘어난다. 계절이 바뀌면 산도 옷을 갈아입는다.
여름철 문에 드리웠던 발이 을씨년스럽고, 삼베옷은 까칠하고 말린다. 무더위가 오기 전 빨아서 챙겨둔 무명베옷을 꺼내어 풀먹여 말리고 손질해서 다리는 일이 이제는 조금 지겹다. 하지만 이런 일이 중노릇의 한몫이니 감내할 수밖에 없다.
옷가지를 손질하고 매만질 때마다 문득 옛 수행자들의 검소하고 질박한 그 모습이 떠오른다. 수많은 불교의 수행자 중에서도 한평생 극도로 검소하게 지낸 마하가섭존자가 선뜻 다가선다.
마하가섭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실질적으로 불교 승단의 지도 역을 한다. 부처님이 가르친 교법(敎法)과 계율을 결집하는 모임(제1결집, 또는 5백결집)을 가질 때 승단의 장로들은 그 자리에 참석할 5백 명의 스님들을 마하가섭이 선발하도록 위임한다.
부처님은 열반에 들기 전 한 제자의 물음에 다음과 같이 대답한 바 있다.
“내가 그 동안 말한 교법과 계율이 내가 죽은 뒤에는 그대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불타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계율을 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마하가섭의 주관 아래 이루어진 그 결집의 덕이다.
마하가섭은 마가다의 바라문 출신으로 그 집안은 큰 부호였다. 일찍부터 출가 수행자가 되려는 뜻을 두었지만 부모가 생존해 계신 동안은 그 생각을 억제했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가산을 집안의 시종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가게에서 감색 옷과 토기로 된 바리때를 사고 삭발을 하여 수행자의 모습을 하고 출가한다. 그 무렵 수행자들이 많이 있던 마가다의 서울 왕사성을 향해 길을 떠난다.
부처님이 왕사성 밖 죽림정사에 계실 때인데, 어느 날 전에 없던 대지의 진동을 느끼고 마하가섭의 출가를 알게 된다. 부처님은 아무도 거느리지 않고 혼자서 왕사성과 나란다 중간 지점에 있는 한 그루 나무 아래 앉아 좌선한다. 새로 찾아오는 제자를 마중하기 위해서다.
그곳을 지나던 마하가섭은 부처님을 보자, 첫눈에 자기가 찾고 있는 스승임을 알아차리고 자리에 엎드려 정중히 인사를 드렸다.
“대덕이시여, 세존은 제 스승이시고 저는 세존의 제자입니다.”
이때 부처님은
“가섭이여!” 라고 불러 곁에 앉도록 하고 그를 위해 법을 설했다. 부처님께 출가하여 여드레 되는 날 마하가섭은 지혜의 눈이 열려 아라한(성자)의 경지에 도달한다. 이 시기를 경전에는 부처님 성도 3년 째 되던 해, 마하가섭 나이 서른 두살 때, 부처님보다 다섯 살 연하라고 적혀 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부처님이 왕사성으로 돌아오던 도중 잠시 쉬기 위해 한 나무 아래 흙바닥에 앉으려고 하자 마하가섭은 자기의 겉옷(가사)을 벗어 네 겹으로 접은 다음 부처님을 거기에 앉도록 한다.
그 자리에 앉아 보니 아주 푹신해서 좋았다.
“가섭이여, 이 가사의 천은 아주 부드럽구나.”
이 말을 듣자 마하가섭은 너무도 황송했다. 출가 수행자의 옷은 거친 천으로 누덕누덕 꿰매서 만든 것인데 그는 출가한 지가 얼마 되지 않고 가게에서 산 가사이기 때문에 새것이었다. 마하가섭은 이 때 조심스럽게 스승께 여쭌다.
“대덕이시여, 저를 가엾이 여겨 제 가사를 받아 주십시오.”
“그럼, 그대는 다 헤진 내 누더기를 입겠는가?”
마하가섭은 이 때 뛸 듯이 기뻤을 것이다. 부처님이 입었던 옷을 물려받았다는 데는 중요한 종교적인 의미가 있다. 훗날 선종에서 법을 이어줄 때 가사와 바리때를 물려주게 된 그 시발점이 여기에 있다.
마하가섭은 이 때를 계기로 극도로 검소하고 질박한 생활을 한다. 그는 평생을 두고 다 헤진 누더기만을 걸치고 지붕 밑에서 머물지 않고 산과 들에서 자며 걸식에 의하지 않고는 어떤 음식도 먹지 않는다. 이를 두타행(頭陀行)이라고 하는데, 범어 두타(dhta)에서 온 말이다. 두타는 ‘털어버리다’의 뜻으로 의식주에 대한 집착과 욕심을 털어버림이다.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덕을 기르기 위한 수행이다.
뒷날 나이가 든 노년의 마하가섭을 보고 부처님은 말씀하신다.
“그대도 나이가 드니 몸도 많이 쇠약해졌구나. 누더기를 걸치기가 무거울 것이다. 이제는 그런 누더기를 입지 않아도 되고 신도들의 공양을 받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될 수 있는 대로 멀리 다니지 말고 내 곁에 가까이 있었으면 좋겠다.”
“제는 오랫동안 산과 들에서 살아왔고 탁발 걸식으로 살아왔지만 그것이 좋다고 여깁니다. 항상 누더기를 걸치고 오늘에 이르렀지만 지금도 이를 좋아합니다.”
“가섭이여, 그러면 그대는 어떤 이유로 그러한 행을 좋아하고 찬탄하는가?”
“하나는 그와 같이 지내는 일이 마음에 즐겁고 다른 하나는 저의 지금 행동이 뒷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된다면 그것도 마음에 즐거운 일입니다.”
이 때 부처님은 그의 뜻에 공감한다.
“착하다, 가섭이여! 그러면 그대 생각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
왕사성 밖 제1결집의 장소인 바이바라산 칠엽굴(七葉窟)에 오르는 중턱에 마하가섭이 살았던 석실이 지금도 남아 있다. 겨우 한 사람이 은신할만한 좁은 암굴이다.
집착과 욕심을 털어 버리고 적은 것으로 만족했던 그의 삶이 포식과 과소비와 무절제의 시대에 그 은덕을 생각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