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각산 길상사에는 뙤약볕이 내려쪼여 늦더위가 기성을 부렸다. 그렇지만 길상사의 숲은 우거지고 극락전 앞뜰에는 천막이 처져있었다.천 여명의 사부대중은 극락전과 우거진 나무그늘 아래에 자리잡고 예불과 청법가에 이어 회주 스님의 설법이 있섰다.
나는 이렇게 들었다.
여름 잘 지냈습니까.
무더울 때는 법회가 없어야 하는데...
늦더위가 남아있지만 곧 처서가 돌아오면 가을 바람이 불어올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에 더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살아있지 않으면 더위도 추위도 느낄 수 없습니다.
살아있지 않으면 무엇이든 받아드릴 수 없는 것이죠.
앞으로 여름을 몇 번이나 받아드릴 수 있는지... 올 여름이 마지막인지 또는 다섯 번, 여섯 번인지... 생각해보셔야 합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드려야 할 것입니다.
더위든 추위든 그것에 구애받지 말고 하루하루를 헛되게 보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출가하여 12년만에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29세에 출가하여 6년만에 해탈하시고 6년이 지난 다음에 카필라성을 방문하시었지요. 41세
때이죠.
카필라성의 정반왕은 아드님이 부처가 되었다는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부처님을 초청했습니다. 그러나 보낸 사신마다 중이 되어버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계실 때 정반왕은 "우다이"라는 사신을 보내면서 "출가하여도 좋으니 부처님을 꼭 모시고 와야한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다이는 개인적으로 부처님을 찾아뵙고 고향으로 가시도록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게서 허락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궁으로 들어가지 않고 근처에서 탁발했습니다.
그러자, 정반왕은 "이런 것은 우리 가문에 없던 일이다 하면서 몹시 불쾌하였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것은 오래전부터 우리가문의 관습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반왕은 세속적인 가문을 이야기했고, 부처님께서는 부처님가계의 빌어먹는 관습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많은 석가족이 출가하였습니다. 왕의 계승자 난다, 사리불도 이때 출가했습니다. 라훌라도 출가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출가하니, 어린아이는 부모의 허락없이는 출가할 수 없다는 율을 정한 것도 이때죠. 12살 정도는 사미승이죠. 구오삼이라고 하죠. 까마귀소리를 듣고 기뻐하며 작난하는 나이란 뜻이지요.
어머니 마하부인께서 세존을 낳아시고 7일만에 돌아가셨으니까 마하프라자티 이모께서 태자를 길러셨죠. 태자가 출가하자 마하프라자티는 그렇게 슬퍼할 수 없었습니다.마하프라자티는 손수 베를 짜서 가사를 지어 부처님께 준 적이 있습니다. 이 가사를 금루황색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12년만에 싯달타가 상거지가 되어 숲 속에 나타났습니다.이모는 특별히 금루황색 가사를 지어 부처님께 선물하면서 부디 받아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게서는 "나보다 더 가난한 자에게 주십시오" 하고 받기를 거절했습니다.이렇게 거절하다가 세 번째 받았습니다.
보시도 삼륜이 천정해야지요. 즉 보시하는 자와 보시를 받는 자와 보시하는 물건이 깨끗해야 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나 그 화려한 옷을 누가 입느냐 하고 망설일 때 미륵비구가 그 옷을 입게됩니다. 미륵비구가 그 옷을 입고 탁발을 나갔는데 사람들은 그 옷 구경만 하느라고 밥을 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미륵비구는 빈 바루만 들고 오게되고 사람들의 구경거리만 되었지요.
40 여년전 저가 해인사를 갈 때입니다. 서울에서 해인사를 가려면 대구에서 차를 갈아타야 합니다. 어떤 중이 모시옷에다 모시두루막까지 입고 있섰는데 옷이 구겨질까봐 서울에서 도착지까지 앉지 않고 서서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그런 것은 옷이 아니라 애물단지이지요.
옷은 추위와 더위를 이기기 위해 입는 것이지요. 분수 밖의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짓은 해서 안될 것입니다.
경전에 나오는 가섭은 다섯 분이지만, 이중 마하가섭(대가섭, 위대한 가섭)존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가시고 부처님의 말씀을 최초로 편집할 적에 편집회의는 500 명의 비구가 모여서 했섰는데 마하가섭이 사회자로 추천되었습니다. 경전에는 이런 말이 없지만 사실상 부처님의 후계자로 인정된 것이지요. 왜냐하면 불교는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고 수평적인 관계입니다. 즉 중앙집권제가 아니고 지방자치제라고 할까요.
마하가섭은 바라문의 아들이었습니다. 부모님께서 가섭의 결혼을 권유하자, 가섭은 부모님의 말씀을 거절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여인의 목각을 부모님께 보이며 이와 똑같은 여인이 있으면 결혼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모님게서 정말 목각과 똑같은 여인을 찾아내어 결혼을 강요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가섭은 결혼했지만 부인과 오누이처럼 지냈지요. 부모님께서 돌아가시자, 모든 재산을 종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사와 바리떼를 사서 부인과 따로따로 부처님을 찾아 부처님게 귀의하게 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죽립정사에 계실 때인데 부처님께서 니그루다 나무 아래서 기다리고 있섰습니다. 마하가섭이 부처님의 제자가 되겠다고 하자 처음에는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가섭은 부처님께 "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저의 스승이고 저는 제자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설법을 하자 8일만에 가섭은 깨달았습니다. 아라한한이 된 것이지요.
마하가섭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네겹으로 접어서 부처님께서 앉으시도록 권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가사를 만지면서 가사가 부드럽다고 칭찬했습니다. 가섭은 그가사를 부처님께 드리고 싶다고 말합니다. 결국 가섭은 부처님의 해진 옷을 원했고 옷을 바꿔입게 된 것이지요.
중국의 선종이 가사와 바리떼를 전하는 것은 여기에 근거를 둔 것입니다.
법의를 지급 조각조각 내어 기워 입고 있지만 사실은 그 당시 수행자의 옷은 버려진 옷이나 시체를 덮었던 옷을 꿰매어 입었던 것입니다. 지금처럼 일부러 조각내어 꿰맨 것은 아닙니다.
가섭은 두타행 제일이라 하지요. 사문은 걸식하지 않고는 먹지 않았습니다. 가섭은 가난한 집만 골라 탁발했고 아난은 부잣집만 골라 탁발했습니다. 가난한 자는 베풀어 다음 생에 부자로 태어나기를 원했고 아난이 부잣집난 골라 두타행을 한 것은 풍족한 집에서 얻자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부자와 가난한 자를 가리지 말고 탁발을 하되 일곱집 이상은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죽림정사에서,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시기를 " 그대는 이제 나이가 들어 몸도 쇠약하였으니 이제 누더기를 걸치기는 무거울 것이고 공양도 신도들이 바치는 것을 공양하도록 권했습니다.
그러자 가섭존자는 "저는 산과 들에 있고 싶고 지금도 걸식을 좋아합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물었습니다.
"어째서 ?"
가섭존자는
" 첫째는 즐겁습니다. 둘째는 뒷사람의 규범이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들이 하는 일이 즐거워야 합니다.뒷사람의 규범이 되어야지요. 곧 사람은 역사의식이 있서야겠지요.
그러자 부처님게서
"착하다. 착하다. 가섭이여 그대 생각대로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잡아함경에 보면 왕사성의 바이마르 산이 나옵니다. 바위와 돌산입니다. 가섭존자가 살았던 석실은 겨우 한 사람만이 기거할 수 있는 석실입니다.
우리는 삶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수행자 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생태계는 조화와 균형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대량생산이 대량소비로 이어지고 이로 인해 생태계가 죽어가고 있습니다.결국 우리 자신이 죽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무심코 먹다버리는 음식쓰레기가 년간 8조원이나 됩니다.
옷, 집, 자동차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검소하고 간소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은덕을 쌓아라고 말씀하셨지요.
은덕은 어디서 오는가?
스스로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몹시 더운날 오셔서 감사합니다. 그 공덕으로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