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法頂(회주스님)
요즘 남쪽에는 천지간에 꽃이다. 동백과 매화와 산수유와 살구꽃과 진달래가 가는 곳마다 눈부시게 피어 있다. 눈길 가는 데마다 발길 닿는 데마다 온통 꽃사태다. 겨울동안 얼어붙었던 땅에 따뜻한 햇살과 부드러운 바람결과 촉촉한 물기가 내리니 굳게 닫은 나무와 꽃들의 문이 활짝 열리고 있다.
내가 사는 곳은 아직도 얼음이 풀리지 않았는데 남쪽은 그토록 찬란한 생명의 조화로 봄을 이루고 있었다. 사람의 성격과 심성을 이루는 데는 인문 사회적인 영향보다는 자연의 힘이 더 클 거라는 생각이 든다. 북방문화와 남방문화를 형성하는 그 요인도 기후조건에 따라 차이를 낳는다.
이 땅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이 사계절 속에서 한국인의 정서와 감성과 의지가 길러졌을 것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계절 속에 살면서 그 계절의 바람결을 쏘이고, 그 계절의 향기와 공기를 숨쉬고, 그 계절의 열매를 맛보면서 살아
간다.
봄에는 파랗게 움트고 여름에는 무성하게 자라고 가을에는 누렇게 익으라. 그리고 겨울에는 말문을 닫고 안으로 여물어라. 이것이 자연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 아니겠는가.
봄이 와도 봄을 느끼지 못하고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해도 그것을 보거나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병든 것이다. 그런 병은 어떤 의사도 치유할 수 없다.
현대인의 95%가 실내에서 일상생활을 보내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움찔 놀랐다. 흙을 밟지 않고 사무실이나 교실, 또는 공장이나 연구실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니 새삼스럽지만 놀라운 사실이다. 현대인들의 관념적인 삶의 실상이 바로 이곳에 있구나 싶다.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손가락과 머리를 굴리면서 살아가는 일상을 과연 건강하고 건전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남쪽에 내려간 김에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시골에 내려가 흙을 만지면서 새롭게 살아가는 한 친지를 방문했다. 소비와 소모의 땅,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혼자서 살아가는 그 의지와 결단에 우선 공감했다. 작가인 그는 새로운 터전에서 새롭게 살고 싶어 새로 집을 지어 나무를 심고 연못을 파고 채소를 가꾸면서 작업을 한다. 보기에 아주 건강한 삶을 시도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면서도 선뜻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럴만한 구실이 저마다 있다. 누구든지 이 사정 저 사정을 따지면 절대로 떠나지 못한다. 한 생각 일어났을 때 한 칼로 두 동강을 내는 그런 결단 없이는 죽어도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도시란 어떤 곳인가. 아스팔트와 보도블록과 시멘트와 서로 키재기를 하는 고층빌딩과 자동차와 매연과 소음과 부패한 정치꾼과 범죄와 온갖 쓰레기들로 뒤범벅이 된 숨막힌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서 어떻게 미래에 대한 꿈과 새로운 창조와 생명이 움틀 수 있겠는가.
도시생활은 철저하게 이기적인 개인주의에 뿌리내리고 있다. 서로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익명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기 때문에 이웃이 없다. 집집마다 문을 굳게 닫아걸고 그 안에 갇혀서 산다. 전화와 전기와 수도와 TV 또는 컴퓨터가 없으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그런 허약한 곳이다.
그러나 시골은 조금은 불편하지만 흙이 있고 나무가 있고 멀리 내다볼 수 있는 들녘과 산마루가 있어 꿈을 지닐 수 있다. 그리고 이웃이 있다. 이웃끼리 주고받으면서 관계를 이룬다. 도시사람들의 처지에서 보면 조금은 예절이 없는 거친 이웃일지라도 그것은 생활습관과 문화적인 차이이기 때문에 길이 들면 쉽게 극복 할 수 있다.
우리가 도시를 떠나 시골을 찾는 것은 거기 아직은 덜 허물어진 자연이 있기 때문이다. 그 안에서 손수 뿌리고 가꾸면서 거두는 재미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한다.
봄이 되니 일이 많다. 새롭게 정리하고 정돈해야 할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어제는 볼일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전에 듣던 음악을 다시 들으니 새로운 감흥이 일었다. 유끼 구라모토의 피아노 음악인데 ‘분수의 소네트’. 처음 이 음악을 들었을 때 어디선가 많이 들은 기억을 더듬다가 영화 해바라기의 주제곡임을 알아차렸다. 소피아 로렌이 주인공으로 나온 영화인데 전쟁이 가져다준 슬픈 이야기다.
혼자서 장거리 운전을 하면 무료하고 따분해서 졸음이 올 때가 있다. 큰 소리로 염불을 하거나 독경을 하면 정신이 맑아져 졸음이 가신다. 그 대신 목이 마르다. 그래서 요즘은 가끔 음악을 듣는다.
뉴욕에서 한 친구가 구해준 음반인데 세 번째 실린 이 곡이 좋아서 이 음악만을 되풀이해 들으면서 먼길을 달려왔다. 이런 음악으로 샤워를 하고 있으면 가슴이 투명해지고 김영랑 시인의 표현처럼 내 마음 어딘 듯 한 편에 끝없는 강물이 흐른다.
사라져 가는 것들은 아름답다. 다시 볼 수 없는 모습들이기에 또한 애처롭고 슬프다.
봄날이 내 가슴에 물기를 돌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