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수환 추기경 관련기사에서 담아온 소중한 글입니다.
길상사가 어떻게 개원되었는지 알수있는 소중한 역사이기도 합니다.
길상사에서 만난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김영한 할머니
지난 12월 14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에서 개원법회가 열렸다.
이 사찰은 지난 시절 삼청각과 함께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던 대원각이 사바 세계를 밝히는 길상사로 거듭난 것이다.
이날에는 법정스님을 비롯한 불 교계 인사는 물론 김수환 추기경 까지 참석해 축하의 인사를 건 냈다.
김영한 할머니의 보시가 일군 길상사의 오늘과 내일…
“길상사가 영혼의 쉼터가 되었 으면 좋겠다”
길상사 개원법회가 열리던 날 3천 여 명의 불자들이 낭낭한 목 소리로 반야심경을 외고 있었다.
은은하게 울리는 목탁 소리와 향 내가 경내 구석구석을 채우는 가 운데 불교계의 대표적인
인사인 직지사 조실 관응 큰스님, 송월주 조계종 총무원장 법정스님 등 불 교계의 주요한 인
사들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여간해서 희노애락의 감정을 포 착하기 어려운 스님들의 얼굴에도 이날만은 희미한 미소가
엿보였다. 불자들의 표정에도 혼잡한 서울에 기쁨의 도량이 생겼다는 사실이 흥에 겨운 듯
찬불가 소리가 여느 때보다 낭랑해졌다.
한복을 곱게 입은 김영한 할머니 도 조금은 상기된 표정으로 부처님 의 영롱한 미소에 눈을
고정시켰다. 찬불 소리가 경내에 흐를 때 로만 칼라의 낯익은 사람이 스님의 안 내를 받으며
경내로 들어섰다. 김 수환 추기경이었다.
미리 정좌하고 앉아 있던 송월주 스님과 법정스님은 추기경과 따뜻 한 인사를 나누었다.
추기경은 두 스님을 향해 “ 축하 드립니다.” 라며 손을 잡았고 법정 스님은 “먼길 찾아오시느
라 고생하 셨습니다.”라고 화답했다.
길상사를 기증한 김영한 할머니도 추기경을 향해 공손히 고개를 숙 였다.부처님 앞에선 추기
경의 모습 은 이채로왔다. 취재진의 열띤 취재 경쟁이 벌어지고 신도들의 박수 소 리가 우레
와 같이 울려퍼지는 가운 데 등단한 추기경은 낮지만 부드러 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새들이 노래하고 물소리가 흐르 는 곳에 길상사가 위치해 기쁩니다.” 라고 운을 뗀 추기경은
법당에 모여 있는 신도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세속에 지친 우리 마음을 안정시 키고 명상
에 잠길 수 있는 쉼터가 절실합니다. 길상사가 정신의 안정 을 주는 우리 마음의 지표가 되기
를 바라겠습니다.” 라며 잔잔하게 축하의 말을 전했다.
법정스님도 이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자신의 소유물을 조건 없이 기꺼이 내놓은 시주의 마음
이나, 무심히 받아들인 마음이나, 묵묵 히 따라준 이 터와 집들이 함께 그 어디에도 집착하거
나 매인 데 없다.” 는 말로 김영한 할머니의 무소유의 마음을 칭송했다.
80 고령이라는 나이에 비해 아직 도 고운 눈매의 김영한 할머니는 한마디해달라는 사회자의
말에 한 동안 주저하다가 마이크를 잡았다.
“저는 배운 것이 많지 않고 죄 가 많아 아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더 더구
나 모릅니 다. 하지만 말년에 귀한 인연으로 제가 일군 이 터에 절이 들어서고 마음속에 부처
를 모시게 돼서 한없 이 기쁩니다. 저의 남은 한으로 이 절의 종을 힘껏 치고 싶을 뿐입 니
다.”
떨리는 듯 감격에 젖은 목소리로 감사의 말을 마친 할머니의 눈에 지나간 시절이 스쳐지나가
는 듯 회한이 어렸다.
길상사는 길상화라는 법명을 가 진 김영한 할머니(81)의 시주에 의해 창건되었다. 대원각의
대지 7천 여 평과 연건평 3천 여 평인 건축물 40여 동을 법정스님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기증
한 것이다. 가격으로 치면 무려 1천억원. 김 영한 할머니가 대원각을 법정스님께 기증할 뜻을
밝힌 것은 지 난 ’87년 미국 LA에서 였다.
그렇다고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김할머니가 독실한 불교 신자는 아니다.
다만 법정스님의 무소유 의 정신을 평소부터 흠모해오다 자신이 평생을 통해 일군 알토란 같
은 재산을 쾌척한 것이다.
법정스님은 무소유의 수행 질서 를 내세우며 이를 거듭 사양하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운동’ 을 펼치면서 김 할머니의 순수한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주변에서도 대원각을 현대적인 정신 운동의 도량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가 잇따랐으며 마침내 김할머니의 소중한 뜻이 아름다운 절로 결실을 맺은 것이 다.
길상사는 지난 ’95년 6월 대한 불교 조계종 송광사 분원으로 등 록되었고 지난 ’96년 부동산
일체 를 증여받아 서울지방법원 성북 등 기소에 등기를 필하며 법적인 절차 를 마무리했다.
이후 불교계의 깊은 관심과 참여 속에 본격적인 보수 불사가 진행되었고, 마침내 간결하 면
서도 불교의 향취가 나는 길상 사가 제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정·재계 실력자들이 즐겨 찾던 밤의 청와대 길상사의 옛 터전인 대원각은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정치 요정 3각 시대를 열었던 대 표적인 요정 중 하나였다.
군사정권 시절 일세를 풍미했던 요정 정치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산수화의 수폭을 연상케 하는 수백 년 묵은 적송과 골기와 지 붕이 고운 대형 한옥들’ 이 요
정 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구중한옥 같은 위용을 뽐냈던 곳이다. 대 원각은 역대 공화국 정치
실세들의 흥망성쇠가 내밀하게 숨겨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때 이승만 전 대통령의 별장 으로도 사용되었던 대원각은 이기 붕, 이재학, 이후락 등의 정
객들이 즐겨 찾았으며 재벌가와 언론문화 계 거물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았던 권력자들의 밤
의 궁전이었다.
김영한 할머니는 해방 이후부터 해온 요정 경영을 통해 ’51년 당시 거금인 6백50만원을 모아
대원각을 인수했으며 김씨가 요정 경영에서 손을 떼고 이모 씨가 갈비집으로 임대하기까지
주요한 정치 실세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본 한국 현대사의 또 다른 페이지이기도 했다.
전성 시절에는 2백 여 명의 호스 티스들이 상주했으며 김영한 씨는 이곳에서 한 시대를 풍미
했던 사교 계의 여왕이었다. 그러나 이제 대원 각은 역사 속에 사라졌고 ‘길상사’ 라는 새 이
름으로 부처님의 역사를 기록해 나갈 것이다.
법정스님은 길상사를 가난한 절 로 만들겠다고 심경의 일단을 비추 었다. 그의 무소유 정신
을 상기시 키듯 요즘은 어떤 절이나 교회를 물을 것도 없이 신앙인의 분수를 망각한 채 호사
스럽게 치장하고 흥청거리는 것이 이 시대의 유행 처럼 되고 있다는 것이다.
절은 안으로 수행하고 밖으로 교화하는 청정한 도량이이기 때문에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이
겨내야 할 과제이지만 선택된 맑은 가난, 즉 청빈은 삶의 미덕이라고 힘을 주었다. 또한 길상
사는 문턱 을 낮추어 누구나 부담 없이 드나 들면서 마음의 평안과 삶의 지혜 를 나누는 위안
의 장소로 만들겠 다는 포부를 밝혔다.
법정의 말대로라면 대원각의 지 나간 세월의 찌끼를 씻어낼 맑은 옹달샘 하나가 만들어진 셈
이다. 이날 김영한 할머니가 1천억대의 재산을 내고 받은 작은 선물은 법 정스님이 준 염주
한 벌이었다.
그러나 할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흡사 부처님의 미 소였다. 법회가 끝난후
에 법정스님 을 통해서 연결된 세사람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법정스님 이 종교
간의 장벽을 허물고 찾아와 길상사의 앞길을 축복해준 것에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들의 공통된 주제는 김영한 할머니였다. 추기경은 “ 김할머 니의 조건없는 헌신에 놀라움
과 감동을 받았다” 고 밝혔으며 법 정은 “ 시절인연으로 인해 귀한 보시로 이룬 도량을 맡게
되었다” 고 길상사의 회주가 된것에 대한 심경의 일단을 털어놓았다.
추기경과 법정과 김영한 할머니는 비록 한자리에서 정담을 나누지는 못했지만 공간을 뛰어
넘어 귀한 만남을 갖고 있었다.
김영한 할머니는 누구인가? 백석과 뜨거운 사랑 나눈, 50년 대 사교계의 꽃 김영한 할머니는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 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 니의 손에서 성장했
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고 어머니 홀로 삯바 느질로 다섯 자녀를 먹여
살리는 참담한 모습을 보다 못해 스스로 자청하여 권번(기생)이 되었다. 이 때부터 그녀는 파
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본명은 영한이지만 백석이 지어 준 ‘자야’, 권번 시절 불려지던 ‘진향’ 그리고 대원각 시절 ‘김
숙’이라는 비즈니스 이름을 갖고 있다. 한국 정악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장안 한량들의 애를 태우던 당시 사교계 의 꽃이었
다.
이때 김영한 할머니는 당시 조선 시단의 천재라고 일컬어졌던 백석과 3년간의 짧지만 뜨거
운 사랑을 나눈다. `그들의 첫만남은 영생고 보의 영어 선생이던 백석이 어느 교사의 이임식
날 함흥 기생의 신분 이었던 그녀를 처음 보던 순간부터 이루어졌다.
백석은 그녀에게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엔 우 리 사이에 이별은 없
어요.” 라며 사랑의 고백을 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헤어짐과 만남이 교차하는 사 랑을 하게
된다.
첫만남부터 상대방에게 불 같은 열 정을 느꼈던 두 사람은 떼낼 수 없는 사이가 되었고 나중
에 백석은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부모의 완강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자 백석은 그녀와 함께 서울로 내려와 청진도에서 살림을 차린다. 일종의 동거를 한 셈
이었다. 그 시 절 백석은 그녀와의 삶을 표현한 듯 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라 는 제목의
시를 짓는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 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 눈 을 푹푹 날리고 /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
다 / 나타샤와 나는 /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타고 /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
골로 가마가리에 살자 …./
이때가 두 사람 사이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 행 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이
후 백석 이 만주로 같이 떠나자고 제의했으 나 이미 부모에 의해 3번씩이나 강제 결혼을 했던
그를 따라간다 는 것은 시부모되는 분들의 마음 을 아프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 고 혼자 서
울로 돌아왔다.
백석은 “당신이 앞선 것만 같 구려 / 당신이 뒤선 것만 같구려 / … … /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 당신이 이야기를 끊는 것만 같구려.”라는 즉흥시 를 남기고 홀로 만주로 떠났
고 그 들의 슬픈 사랑도 끝이 났다.
백석은 영한 할머니를 ‘자야’ 라고 불렀다. 이태백의 시 ‘자야 오가’에서 나오는 슬픈 사랑의
주인공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만약 김영한 할머니가 기생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원로 시인의
아내로서의 안락한 삶을 누렸을 지도 모른다.
이후 김영한 할머니는 성북동 골짜기에 대원각이라는 요정을 세우고 장안의 명사들를 초대
했 던 화려하면서도 불운하고 한많은 삶을 꾸려왔다.
엄청난 재산을 가졌으면서도 그녀는 늘 가슴속에 백석을 품 고 살았다. 백석과의 이루지 못
한 사랑을 그리며 백석 창작 기금 을 쾌척하고 노안과 떨리는 손으 로 ‘내사랑 백석’이라는 자
전적 사랑이야기를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녀는 배움에도 욕심이 많아 중앙대 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 한 뒤 미국 유학 시험에 합
격했으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인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글 / 최병일(자유기고가) 사진 / 민영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