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그림자에게
法頂(회주스님)
한평생 나를 따라다니느라고 수고가 많았다.
내 삶이 시작될 때부터 그대는 한시도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햇빛 아래서건 달빛 아래서건 말 그대로 '몸에 그림자 따르듯' 그대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따라다녔다.
그러니 그대와 나는 뗄려야 뗄 수 없는 운명적인 동반자다.
오늘은 그대에게 내 속엣말을 좀 하려고 한다. 물론 전에 없던 일이다.
그대도 잘 아다시피 내 육신의 나이가 어느덧 70을 넘어섰구나.
예전 표현에 의하면 사람의 나이 일흔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라고 했다. '고희(古稀)'라는 말을 남의 일로만 알았는데 이제는 내가 그 앞에 마주서게 되었다.
요즘에 와서 실감하는 바인데 사람이 늙는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본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얼마가 될지는 모르지만 남은 세월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 허락된 남은 세월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든다.
따라서 내 삶을 추하지 않게 막음해야겠다고 다짐한다.
혼자서 살아온 사람은 평소에도 그렇지만 남은 세월이 다할 때까지 자기관리에 철저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늙어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리가 소홀하면 그 인생이 초라하게 마련이다.
꽃처럼 새롭게 피어나는 것은 젊음만이 아니다.
늙어서도 한결같이 자신의 삶을 가꾸고 관리한다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수 있다.
화사한 봄의 꽃도 좋지만 늦가을 서리가 내릴 무렵에 피는 국화의 향기는 그 어느 꽃보다도 귀하다.
자기 관리를 위해 내 삶이 새로워져야겠다는 생각을 요즘에 들어 자주 하게 된다.
누구보다도 그대가 잘 아다시피 내 삶의 자취를 돌아보니 나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대중 앞에서 되는 소리, 안 되는 소리를 너무 많이 쏟아 놓았다.
기회 있을 때마다 침묵의 미덕과 그 의미를 강조해온 장본인이 침묵보다 말로 살아온 것 같은 모순을 돌이켜본다.
지난 가을 지방 순회강연 때 이번이 내 생애에서 마지막 순회강연이 될 거라는 말을 흘렸는데, 이것은 거저 하는 소리가 아니라 생각이 있어 예고한 말이었다.
길상사에서 짝수 달마다 해오던 법회도 내년부터는 봄, 가을 두 차례만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절 소임자에게도 미리 알려 두었다.
어느 날 갑자기 이 지상에서 내 자취가 사라진다면 가까운 이웃들에게 충격과 서운함이 클 것이므로 그 충격과 서운함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서서히 물러가는 연습을 해두려고 한다.
그리고 달마다 쓰는 이런 글도 좀 달리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서가를 돌아보니 내가 그동안에 쓴 글들이 번역물을 포함해서 30권 가까이 되는구나.
말을 너무 많이 해왔듯이 글도 너무 많이 쏟아놓은 것 같다. 세월의 체에 걸러서 남을 글들이 얼마나 될지 자못 두렵다.
말과 글도 삶의 한 표현방법이기 때문에 새로운 삶이 전제됨이 없이는 새로운 말과 글이 나올 수 없다.
비슷비슷한 되풀이는 쓰는 사람이나 읽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선감이 없는 말과 글은 그의 삶에 중심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할 수만 있다면 유서를 남기 듯한 그런 글을 쓰고 싶다.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읽히더라도 부끄럽지 않을 삶의 진실을 담고 싶다.
옛글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다.
'나이 칠십에도 어떤 직위에 있는 것은 통행금지 시간이 되었는데도 쉬지 않고 밤길을 다니는 것과 같아서 그 허물이 적지 않다.'
이 귀절을 나는 요즘 깊이 음미하고 있다. 요즘의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참으로 고맙게 받아들이고 있다.
물론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정년이란 있을 수 없다.
생의 마감인 죽음에 이르기까지는 그 개인에게는 현역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개인을 넘어서 사회적인 차원에서 보면 정년제는 합리적이다.
새로운 세대들이 진출함으로써 그 조직이 활성화될 수 있다.
묵은 것과 새것이 교체됨으로써 새롭게 이어갈 수 있다.
우리 나라 모든 조직에는 정년제가 행해지고 있는데 정치인과 스님들만 예외다.
정치인들은 자기네가 법을 만들 때 그렇게 만들어놓은 것이다.
그래서 노탐(老貪)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추한 정치인들이 더러 있다.
수행의 세계에는 물론 정년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직위에는 반드시 정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나이 많은 늙은 중이 어떤 직위에 있다는 것은 더 물을 것도 없이 추하다.
목사와 신부도 70이 정년이므로 때가 되면 현직에서 물러나 은퇴한다는 말을 들었다.
일을 벌이다 보니 나는 본의 아니게 '회주(會主)'라는 관사를 내 이름 위에 붙이게 되었다.
회주스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회장님 소리를 듣는 것 같아 속으로는 언짢았다.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에서 적당한 직책이 없어 상징적인 의미로 모임의 주관자란 뜻에서 회주라는 이름이 생겼지만 일찍이 없던 호칭이다.
길상사의 경우도 그렇다. 절은 주지에게 모든 책임이 주어져 있다. 회주는 불필요하다.
맑고가 됐건, 길상사가 됐건 내가 들어 시작한 것이므로 끝까지 뒷바라지할 책임이 내게 있다.
맑고는 회원의 한 사람으로서, 길상사는 대중의 한 사람으로서 내 건강이 허락하는 한 뒤에서 도울 것이다.
회주라는 이름은 수행자에게 욕된 호칭이므로 아무도 입에 담지 말아주기를 바란다.
남은 세월 동안에도 나를 낱낱이 지켜볼 그대에게 내 진실을 쏟아 놓았다.
내 남은 삶을 추하지 않고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 한 말이니 그대로 받아주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