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칭찬하고 헐뜯는 말을 듣더라도 마음에는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잘한 일 없이 칭찬을 받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요,
허물이 있어 비방을 듣는 것은 진실로 기쁜 일이다.
기뻐하면 허물을 알아 반드시 고치게 되고, 부끄러워하면 도 닦는 데 채찍질이 될 것이다.
남의 허물을 말하지 말라.
마침내는 그 허물이 내게로 돌아올 것이다.
남을 해치는 말을 들으면 부모를 헐뜯는 말과 같이 여기라.
오늘은 남의 허물을 말하지만, 내일은 머리를 돌려 내 허물을 말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이 다 허망한 것인데, 비방과 칭찬에 어찌 걱정하고 기뻐할 것인가.
종일토록 남의 잘잘못을 시비하다가
밤이 되면 흐리멍덩 잠에 빠진다.
이 같은 출가는 받은 은혜만 무거워져
삼계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라.
- 자경문 -
말하기 좋다고 남의 말 말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이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
우리 옛 조상들이 읊은 노래인데, 지당한 가르침이다.
항상 메아리가 따르는 법이라, 남에 대한 이야기를 이러쿵저러쿵 하게 되면
내 자신이 또한 남의 입살에 오르내리게 된다.
그러니 남의 일에는 옳건 그르건 간에 아예 입을 다무는 것이 현명한 생활태도라고 옛 사람은 노래로써 경계한 것이다.
사람의 얼굴에는 눈이 두개 있고 귀도 양쪽에 달려 있는데 입은 하나 밖에 없다.
많이 보고 두루 보고 적게 말하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만약 입이 두 개라면 세상은 얼마나 더 시끄러울 것인가.
자신의 내면이 허하면 밖으로 눈을 판다.
눈을 팔다 보면 자기자신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남의 일에 부질없이 참견을 한다.
우리 속담에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 는 말이 있는데,
자신의 더 큰 허물은 덮어두고 남의 허물만을 들추어 탓한다는 뜻이다.
너나 할것없이 누구에게나 스며 있는 중생의 부끄러운 속성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내 자신도 돌이켜 생각하니 한없이 부끄럽다.
은혜로운 부처님 법을 만난 지 30년이나 되었으면 아직도 남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부질없는 험담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뒷방에서 그런 자리에 한몫 끼게 되면 자신의 허물은 까맣게 잊은채 남을 함부로 심판하려고 든다.
그때마다 내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인해 나는 한없이 초라하고 불쌍하다.
우리가 신앙을 가진 것은 그와 같은 중생의 속성에서 벗어나 의젓하고 떳떳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다.
모처럼 신앙의 세계에 들어왔으면서도 잘못 익힌 지금까지의 버릇을 고치지 않는다면 신앙을 갖게 된 의미가 없다.
절에서는 말이 많다.
물론 교회고 성당이고 비슷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종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말이 적은데,
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이 많다.
말이 많다는 것은 쓰잘데기 없는 소리가 많다는 뜻이다.
.^^.
걸핏하면 남 흉보는 일로써 집회를 삼으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어떤 절의 신도들은 텃세가 심하다.
자기네가 먼저 그 절에 다녔다고 해서 새로 나온 신도들한테 콧대를 세우고 군림하려고 든다.
아무개 스님하고 아무개 보살이 친해지더라며 시기와 질투를 넌지시 비추기도 한다.
이 다 중생놀음임을 알아야 한다.
누가 누구하고 가깝건 멀건, 어떤 신도가 주지실 청소를 하건 말건 자신의 신앙생활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인배와 아녀자의 탈을 벗지 못하면 그는 진정한 불자일 수가 없다.
모처럼 정법의 문턱에 들어섰으면서도 그 정법을 몸에 익혀 생활하지 못하면 중생계에서 벗어날 헤어날 기약이 없다.
언젠가 들은 이야기다.
열심히 절에 다니던 한 신도와 우연히 갈에서 마주쳤는데, 인사말로 요즘도 아무데 절에 잘 나가느냐고 했더니,
그녀는 웃으면서 이제는 다른 절로 나간다고 했다.
무엇 때문이냐고 하니 그녀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그 절은 불란서 여배우들이 많아서요 라고 했다.
불란서 여배우라?
나는 돌아서면서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어리벙벙했다.
몇걸음 걷다가 퍼뜩 그 말뜻을 알아차리고 나는 혼자서 크게 웃었다.
길을 가던 행인들만 아니었다면 한참을 더 웃었을 텐데 나는 가까스로 웃음을 거두면서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불란서 여배우’를 줄이면 ‘불여우’가 된다.
그러니 그 절에는 불여우들이 많아 나가던 걸음을 돌려 불여우가 적거나 없는 절을 찾아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시정의 절에 ‘불여우’가 많은지 적은지 산중에서만 사는 나로서는 자세히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있을 법한 일로 여겨졌다.
바른 신앙을 갖지 못하면 자칫 아녀자의 속성이 드러나 불여우로 둔갑할 위험이 있다.
길에서 마주친 그 신도에게도 허물은 없지 않다.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의지했다면 그 어떤 여배우(여우)가 등장하건 말건 문제 밖이었을 텐데,
공연히 눈을 밖으로 팔았기 때문에 거기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이다.
이런 기회에 우리 모두 솔직히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내 자신은 불자라고 하면서 아무개 보살이라고 불리면서 여배우는 아닌지.
남자 신도들은 남자 신도들대로 아무개 거사로 불리면서 혹시 시베리아 늑대나 곰으로 변신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은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 만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
그래서 발 없이 말이 천리를 간다고도 하지 않는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말수가 적어야 한다.
생각대로 불쑥불쑥 나오려는 말을 안으로 꿀꺽꿀꺽 삭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어리석음이 지혜로 바뀔 수 있다.
보살계본인 <범망경>에는 열 가지 중대한 계 가운데,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지 말라 는 제목이 있다.
“자기를 칭찬하고 남을 비방하거나 남을 시켜 자기를 칭찬케 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게 해서는 안된다.
보살은 모든 이웃을 대신해서 남의 비방과 욕을 달게 받으며, 나쁜 일은 자신에게 돌리고 좋은 일은 남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자기 공덕을 드러내고 남의 잘한 일을 가리어 타인에게 비방을 받게 한다면 그것은 큰 죄가 된다.“
같은 보살계본에는 또 이런 구절도 있다.
“비방하지 말라.
나쁜 마음으로 남을 까닭없이 비방하면서 그가 무슨 허물을 지었다고 말하지 말라.
남을 해롭게 하여 함정에 빠뜨리면 죄가 된다.“
타인에 대한 비난은 언제나 오해를 동반한다.
과거의 자로써 현재를 재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내면에서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강물처럼 흐르는 존재.
날마다 똑같은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남을 심판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판단을 내렸을 때 그는 이미 딴 사람이 되어 있을 수도 있다.
말로써 비난하는 버릇을 버려야 우리 안에서 사랑의 능력이 자란다.
지혜와 자비가 그 움을 틔운다.
‘세치 혀로서 다섯 자의 몸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는 옛말이 있다.
간절한 말씀이다.
절에 가면 삼함三緘이라고 쓴 표지가 큰 방에 붙어 있는데 입을 세 번 꿰매라는 뜻.
말을 삼가라는 교훈이다.
신앙인들은 출가 재가를 가릴 것 없이 말수가 적어야 한다.
그래야 쓰잘데기 없는 헛소리를 덜하게 되고 안으로 말의 의미가 여물게 된다.
효봉선사 어록에 이런 법문이 실려 있다.
“항상 자기 코 끝의 뾰족한 것만 보고
남의 눈동자 모난 것은 묻지 말라.
만약 이와같이 수행해 나아간다면
어디를 가나 도량 아닌 곳이 없으리라.“
<86.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