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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3-12-23

    큰 마음

본문

며칠 전 이른 아침에 도예가인 윤광조 님이 찾아왔었다.


큰 절에서 자고 일찍 올라8었다.


산길에 수북이 쌓인 낙엽을 밟으면서 오다가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하낟.


‘나무처럼 사라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이 내 마음에 꽂혀 하루종일 나무에 대해서 생각을 했었다.


나무처럼 아무 욕심없이 묵묵히 서서, 새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고 열매를 맺고


그러다가 때가 오면 훨훨 벗어버리고 빈 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당당하게 서있는 나무.


새들이 날아와 팔이나 품에 안기어도 그저 무심할 수 있고,


폭풍우가 휘몰아쳐 가지 하나쯤 꺾이어도 끄떡없는 요지부동.


곁에서 꽃을 피우는 화목이 있어 나비와 벌들이 찾아가는 것을 볼지라도 시샘할 줄 모르는 의연하고 담담한 나무.


한여름이면 발치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지나가는 나그네들을 쉬어가게 하면서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 음덕을 지닌 나무....


이렇게 생각을 따라가니 ‘나무보살’이란 말이 절로 새어 나왔다.



사람을 대할 때 동물성형과 식물성형으로 분류하여 관찰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내 나름의 편견이지만, 이러한 분류를 한동안 견지한 적이 있었다.


너무 약삭빠르고 탐욕스럽고 극성스러우며, 몸에 좋다고 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게걸스럽게 마구 먹어대면서도 일년 내내 책 한 권 읽으려고 하지 않는 골빈 사람들.


손님이 찾아가도 속옷 바람으로 대하고, 말씨가 거칠고 무례하며,


남의 말은 귓등으로 듣고 자기 말만 끝도 없이 늘어놓는 사람들,


남의 불행을 자기 행복의 척도로 삼으려는 그런 사람들을 대하면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를 내 호흡기로는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였다.


지금은 내 스스로가 편해지고 싶어서 그런 분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서슬이 푸른 치기어린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무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저것 복잡한 분별없이 단순하고 담박하고 무심히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낙엽귀근(落葉歸根), 잎이 지면 뿌리로 돌아간다.


나무들이 걸쳤던 옷을 훨훨 벗어버리고 알몸으로 서 있는 낙목한천(落木寒天) 아래서


우리들이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런 계절.


올 한 해가 또 사라져간다.


우리에게 허락된 세월이 손에 쥔 모래알처럼 술술 빠져나간다.


이 한 해를 나는 나무처럼 살지 못했구나 싶은 후회가 뒤따르고 있다.


안이한 일상적인 타성에 젖어 하는일 없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해버린 초라한 나를 응시한다.



<대품반야경> 금강경에서 부처님은 이와같이 말씀하신다.


“보살은 열반에 드는 사람 중에서도 으뜸이므로 ‘마하살’ 이라고도 한다.


보살은 모든 법을 알고 일체중생을 구하겠다는 큰마음을 낸다.


그 마음은 금강석처럼 굳기 때문에 반드시열반에 들고, 열반에 드는 사람중에서도 으뜸이 된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인 존재다.


뜻글자인 한자의 사람 인(人)자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사람 인자는 서로 기대고 의지해 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서로 기대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잘살고 못사는 것도 대개는 이웃과의 관계여하에 따라 결정된다.


세상에서는 자신이나 집단의 이해타산에 의해서 관계가 형성되고 지속된다.


그러나 보살은 이웃을 통해 자신의 존재의미를 드러내려는 삶의 양식을 갖는다.


그러므로 이웃이야말로 내 삶의 터전이요 마음 닦는 대상인 것이다.


‘마하살’이란 큰 보살이란 뜻인데, 만나는 모든 이웃을 다 구하겠다고 큰마음을 낸 사람이다.



<화엄경> 보현행원품에서, 보살에게 있어 이웃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서 이와같이 말하고 있다.


“보살은 이웃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 보리심을 내고,


보리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므로 이웃이 없다면 보살은 결코 깨달음을 이룰 수 없다.“


그러니 우리가 만나는 이웃을 시들한 존재로 생각하지 말고,


이웃이 곧 내 스승이고 선지식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종교에 귀의했건 간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이웃을 보지 말고,


이웃을 통해 자신을 거듭 일깨우고 확인하라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마다 손을 뻗쳐 보살펴주라는 것이다.


그런 생활태도가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배어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만나고 부딪치는 구체적인 이웃을 통해 내 자신이 계발되고 형성되고 눈뜨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라는 것이다.


그러한 확신은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이 견고하기 때문에 반드시 열반에 든다는 것.


여기서 열반은 죽음을 가리킨 말이 아니고,


모든 번뇌가 사라져 본래 청정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 경지를 말한다.


부처님의 입멸을 열반이라고 하는 것도, 모든 번뇌가 사라져 평안의 경지에 들어갔다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계속 된다.


“큰 마음이란 어떤 것인가. 보살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원을 세운다.


이 세상을 청정하게 정화시키겠다.


모든 존재에 집착을 버리겠다.


모든 이웃과 뜻을 같이 하겠다.


모든 이웃을 구제하여 깨달음을 얻도록 하겠다.


모든 이웃을 구제했다할지라도 한 사람도 구제했다는 생각을 두지 않겠다.


모든 법(현상)에 생멸이 없음을 깨닫겠다.


밝은 지혜의 마음으로 6바라밀(보살행)을 수행하겠다.


지혜를 닦아 모든 법을 알겠다.


모든 법이 공하여 자취(相)가 없음을 알겠다.


그 자취가 없기 때문에 그 실상을 깨닫겠다.“


이 열가지 원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보살의 원이 곧 큰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을 위한 원은 없다.


원래 원(願)이란 말이 개인적인 욕구가 아니라 대사회적인 소망이기 때문에,


대사회적인 소망 안에 개인의 요구는 용해되어 있다.


사람은 원을 세우고 살아야 한다.


원이란 더 말할 것도 없이 삶의 지표다.


삶에 뚜렷한 지표가 있으면 어떤 어려운 환경에 부딪치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그것을 딛고 일어설 지혜와 용기가 생긴다.


욕심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것이지만,


원은 나와 남이 함께 추구하고 누리는 사회적인 희망이요 복지다.


이런 원을 통해서 사람은 거듭거듭 형성되어 갈 수 있다.


원이 없는 사람은 이리 흔들리고 저리 흔들리면서 그때그때 땜질 인생으로 노상 비틀거린다.


그러나 큰 원을 세우고 살게되면 그 원으로 인해 순간순간의 삶이 아무렇게나 소흘해질 수 없다.


불자들의 공통적인 원은 다음 네가지다.


“중생이 끝없지만 기어이 건지리다.


번뇌가 다함없지만 기어이 끊으리다.


법문이 한량없지만 기어이 배우리다.


불도가 위없지만 기어이 이루리다.“


그러나 우리는 입으로만 건성으로 외지 실제로는 이 원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


단 한두 가지라도 좋으니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원을 세운다면,


시들한 일상이 새로운 빛으로 발하게 될 것이다.


원 자체가 마침내 우리를 건져줄 것이다.


당신은 무슨 원을 세우고 사는가?



경전은 다시 이어진다.


“보살은 또 지옥 아귀의 괴로움에 허덕이는 이웃을 가엾이 여겨,


그 괴로움을 대신 받겠다는 큰 마음을 일으킨다.


그래서 때묻은 마음, 화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일으켜 법을 믿고, 법을 찾고, 법을 받들고, 법을 수행하며,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열반에 드는 사람 중에서 으뜸이 된다.


이와같은 보살을 가리켜 마하살이라 한다.“


남의 고통을 내가 대신 받겠다는 것은 열린 큰 마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내가 몸소 지옥에 들어가겠다는 원이다.


옛날 어떤 선사는 항상 ‘나무 지옥대보살’을 염했다고 한다.


지옥의 큰 보살에게 귀의한다는 뜻이다.


지옥에 들어가는 것과 떨어지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떨어지는 것은 업의 힘에 의해 내 의지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이 떼밀려 가는 것이지만,


들어가는 것은 청정한 원의 힘으로 내 발로 당당하게 걸어가는 것이다.


흔히 우리들은 다들 좋은 세상에 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큰 마음을 일으킨 보살은 스스로 고통스러운 세상을 선택한다.


고통받는 이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또한 거기서 이끌어내기 위해서다.


이 큰 원과 큰 마음이 곧 보살의 마음이고 자비심이며 보리심이기 때문에,


지옥의 고통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고통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애지중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고통도 달게 받을 수 있는 바로 그 마음이다.


사랑하는 자식으로 인해 부모들은 생명의 신비를 일으킨다.


앞에서 인용한 보현행원품의 가르침을 더 구체적으로 이렇게 옮길 수도 있다.


“부모는 자식으로 인해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심으로 인해 보리심을 내고,


보리심으로 인해 깨달음을 이룬다.


그러므로 자식이 없다면 그 어버이는 결코 눈을 뜰 수 없다.“


그러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식을 애간장 태우는 귀찮은 존재로 여기지 말고


선지식이나 스승으로 고쳐 생각하라는 교훈이다.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란 말도 있지 않던가.


<87.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