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글에서>
法 頂(스님)
물 아래 그림자 지니
다리 위에 중이 간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 데 물어보자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보고 가노메라.
송강 정철의 시조인데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에 그림자가 어리어 다리 위를 쳐다보니 한 스님이 지나가고 있다. 대사, 잠깐 물어보세. 어디로 가는 길인가? 스님은 지팡이를 들어 흰구름을 가리키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가던 길을 스적스적 지나간다. 운수납자(雲水衲子)의 기품을 지닌 모습이다.
‘막대로 흰구름 가리키며 돌아 아니보고 가노메라’는 표현은 이 시조의 백미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배척하던 조선시대의 스님들은 유생 관료들에 의해 말할 수 없는 박해를 받았다. 그 당시 스님들은 칠천(七賤)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종, 기생, 악공과 광대, 가죽신을 만드는 갖바치, 고을의 아전, 관아에서 심부름하는 하인과 함께 천한 계급으로 다루어졌다.
그래서 스님들한테는 하대를 했다. ‘저 중아 게 있거라 너 가는데 물어보자’라고 한 것도 이런 상황에서 나온 표현이다. 심지어 스님들에게는 도성(都城 - 서울) 출입이 법으로 금지돼 있었다. 이와 같은 악법이 사라진 것은 한말 일본스님들에 의해서였다. 일본스님들은 남의 나라 도성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데 정작 본국의 스님들은 자기네 나라 도성을 출입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당국에 시정을 요구하게 된 것이다.
정치권력으로부터 보호를 받던 고려시대보다도 갖은 천대와 박해를 받던 조선시대에 뛰어난 수행자들이 많이 출현했다는 사실은 오늘의 수행자들에게 가르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동서양의 종교역사를 통해서 볼 때, 종교는 정치권력을 등에 업을 때가 가장 반종교적으로 타락했고, 체제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가 가장 순수하게 제 기능을 하면서 성장할 수 있었다.
불타 석가모니는 <숫타니파타>에서 ‘천한 사람’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얼마 안되는 물건을 탐내어 사람을 죽이고 그 물건을 약탈하는 사람.
증인으로 불려 나갔을 때 자신의 이익이나 남을 위해서 거짓으로 증언하는 사람.
가진 재산이 넉넉하면서도 늙고 병든 부모를 섬기지 않는 사람.
남의 집에 갔을 때는 융숭한 대접을 받았으면서 그쪽에서 손님으로 왔을 때 예의로써 보답하지 않는 사람.
사실은 성자[깨달은 사람]도 아니면서 성자라고 자칭하는 사람, 그는 전 우주의 도둑이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가장 천한 사람이다.
날 때부터 천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귀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그 행위에 의해서 천한 사람도 되고 귀한 사람도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