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8주년 기념 법회 - 12월 11일
날씨도 추운데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올 한해도 저물어 갑니다. 전 오늘 길을 나서면서 지난 한 해를 잘 살았던가, 그렇지 못한가 되돌아보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극락세계도, 천당도 아닌 사바세계입니다. ‘사바사바’ 하면서 적당히 살아간다는 것이 아니고 참고 견디면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한자로는 감인(堪忍)이라고 합니다.
세월이 오는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란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닙니다.
그 세월 속에 있는 사람이, 사물이, 현상이 가고 오는 겁니다. 철학자들의 표현에 의하면 시간 자체는 존재하는 것, 그냥 있는 것입니다.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자신이 시간 속에서 오고 가고 변해가는 겁니다.
무상하다는 것, 덧없다는 것은 시간 자체, 세월이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세월 속에서 사는 우리들 자신이 예측할 수 없는 세상을 살기 때문에, 늘 한결같지 않고 변하기 때문에 덧없다는 겁니다. 우리들의 한 생애 중에서 또 한 해가 이와 같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해가 바뀌면 어린 사람들은 한 살이 보탭니다. 반면에 나이든 사람들은 한 살을 줄입니다.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한다면 우리 인생이 너무 아깝습니다.
세월은 흘러가는 물과 같아서 한 번 지나가면 되찾을 수가 없습니다. 순간순간을 후회없이 잘 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선방에 가면 이런 글귀를 볼 수 있습니다.
‘생사사대(生死事大) 무상신속(無常迅速)’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생사(生死)입니다. 한 순간도 제정신 차리지 않고 있으면 오락가락 흔들리고 종잡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생사입니다. 때문에 이 생사가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 큽니다.
그 생사를 받쳐주는 것이 무상(無常)입니다. 무상은 한 순간도 영원하지 않고 변합니다.
때문에 한 생각 잘못 먹으면 엉뚱한 길로 비껴져 나가고 정신을 잘 차리면 바른 길에 들어 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잘 살아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한 번 지나가버린 세월은 다시 되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택시를 타고 길상사로 가자고 하니깐, 기사님이 ‘아,그 부자절이요? 하더랍니다.
‘부자절’이라는 이 말이 제게는 한동안 화두가 되었습니다. 이 절을 8년 전에 처음 만들 당시에 절이건 교회건 할 것 없이 너무 넘치고 흥청망청하기에 길상사는 가난한 절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했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보기에, 물론 일부이겠지만 부자절이라는 말을 한다는 소식에 상당히 착잡했습니다. 8년전 요정이던 대원각을 절로 만들 때 신문,방송에서 무척이나 떠들썩했습니다. 땅이 몇 천평이고, 시가 몇 십억이니 하니까 부자절로 보여졌나봅니다.
그래서 저한테 한동안 편지가 많이 왔었습니다. 대부분이 도와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치 이 절이 내 개인 소유인 것처럼 여기저기서 도와달라고 해서 아주 곤란했던 기억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요정을 절로 만드느라 빚이 5-6억씩 되던 때였습니다.
누구나 되고 싶어 하는 ‘부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국어사전에 보면 ‘살림이 넉넉한 사람,재산이 많은 사람’으로 아주 간단명료하게 나옵니다.
농경사회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부자에 대한 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부자가 더 무섭다’
요즘도 이런 말들을 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인색하나는 겁니다.
‘부자는 망해도 3년 먹을 것이 있다.’
그만큼 부를 축척해 놓았다는 뜻일 겁니다. 요즘 말로 하자면 ‘기업은 망해도 기업주는 멀쩡하다’는 소리나 같은 의미입니다.
‘부자에게도 한이 있다.’
부자가 되기까지 그 나름대로 한들이 맺혔다는 애깁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난을 면하기 위해서 전심전력을 기울여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절약하여 부자가 될 수도 있었겠다는 애기일 겁니다.
또 이런 것도 있습니다.
‘부자가 화나면 세 동네가 망한다’
저는 이 속담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소설에도 나오지만 조선조 말기 일부 나쁜 대지주들이 소작인들을 수탈하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부자에 대한 속담들을 찾아보면서 오늘날 재벌과 옛날의 부자들은 어떤 상관관계에 있는가를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인간의 탐욕은 끝이 없습니다. 경전에 보면 ‘탐욕이 바로 생사윤회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탐욕이란 지난친 욕심, 분에 넘치는 욕심입니다. 자기 그릇보다 더 많이 채우려고 하는 욕구입니다. 이것은 끝이 없습니다.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비단 가진 사람들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들 모두가 무엇을 가지고도 만족할 줄을 모릅니다.
그러면 가진 것만큼은 행복합니까? 상관관계가 있겠지만 행복은 반드시 가진 것에 의해서만 충족되는것이 아닙니다.
행복은 결코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서 향기처럼 우러나와야 하는 겁니다.
똑같은 여건 속에서도 어떤 사람은 행복을 누리며 살고, 어떤 사람은 불만 속에서 지냅니다. 가진 것만큼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너나없이 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아주 본능적인 소망입니다.
다들 여유 있게 잘 살고 싶어 합니다. 부자가 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를 쓰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세계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미국과 같은 강대국들이 전 세계를 시장화 하여 더 큰 부를 누리겠다는 일종의 새로운 경제적인 침략입니다.
졸부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당한 노력에 의해서 재산을 모으지 않고 투기와 같은 방법으로 갑작스런 부자가 된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갑작스런 부는 사람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자기 분수 밖의것이기 때문입니다.자기 그릇을 채울 만큼 지녀야 하는데 자기 그릇은 컵밖에 되지 않는데 큰 동이로 채우려고 하니 넘치는 겁니다.
한 예로 로또복권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 아침에 몇 십 억 짜리 복권에 당첨되는 사람이 있다고 다들 얼마나 부러워합니까. 그러나 그 당사자는 그날부터 불행해집니다. 동서고금으 통해서 다 드러난 사실입니다. 그는 사회적 관계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됩니다. 지금까지 그가 살아온 의미도 잃게 됩니다. 갑자기 많은 돈이 생기니깐 지금껏 착실하게 피땀 흘리며 차곡차곡 노력하면서 살아온 삶의 길들이 의미를 잃게 되는 겁니다. 가까운 친구와 친척들로부터도 멀어지게 됩니다. 이 많은 돈을 어찌 관리할까 하는 생각에 잠인들 온전히 자겠습니까. 세상에 공것은 없습니다. 횡재를 만나면 반드시 횡액을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물질인 것이고, 인과관계입니다. 돈이란 것은 혼자만 오는게 아니라 어두운 그림자가 같이 따라옵니다.
오래 전에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전북의 어떤 스님이 기도를 해서 복권에 당첨되었답니다. 자기도 어쩔줄 몰라 하다 한 몫 떼어 은사스님께 절을 하나 사드리고, 자기도 절을 하나 샀다고 합니다. 그러더니 절 아래동네 처녀와 눈이 맞아 결혼해 환속하였답니다. 그 후로 들려오는 이야기가 어디서 택시기사를 하고 있답니다. 난데없는 돈이 생기면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가난은 결코 미덕이 아닙니다. 우리가 맑은 가난을 내세우는 것은 지나친 탐욕, 자기 분수를 모르는 낭비, 흥청망청하는 것에서 벗어나 맑고 조촐하게 가질 만큼만 가지자는 것입니다. 잘 살기 위해 노력해 합니다. 할 수 있다면 다같이 부자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가진 사람보다도 못 가진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구조적으로 가진 사람들 때문에, 같이 가져야할 사람들이 자기 몫을 빼앗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진정한 부자란 가진 것이 많건 적건 덕을 닦으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덕이란 이웃에 대한 배려입니다. 이웃과 나누어 가져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재화는 원천적으로 우리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에 나올 때 가지고 나온 것도 아니고 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어떤 인연에 의해서 우주의 선물인 재화가 내게 잠시 맡겨진 겁니다. 그것을 바르게 관리할 줄 알면 연장이 되는 것이고, 그런 소식을 모르고 흥청망청 탕진하면 곧 회수당합니다. 검찰이나 경찰이 그런 것들을 회수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재물이 생겼을 때일수록 조심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설사 내 정당한 소득이라 하더라도 내 것이 아니라 내게 맡겨진 것이라 여기십시오. 왜냐하면 재물이란 바르게 쓰면 덕을 닦게 되는 것이지만 잘못 쓰게 되면 복을 감하게 되는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이 많건 적건 덕을 닦으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어려운 이웃과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 잘 사는 사람이고 또한 부자입니다. 모든 것은 한때입니다. 늘 지속되는 것은 없습니다. 부자라고 해서 늘 부자란 법은 없습니다. 무상하다는 것, 변한다는 것은 어떤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자기의 의지적인 노력, 창조적인 노력을 통해서 축적할 수도 있고 흥청망청하면 날려버릴 수도 있는 겁니다.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모두가 한 때입니다.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무엇이 남습니까.
남의 일이 아니라 각자의 일로 생각해 보십시오. 남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홀로 있는 자기 자신 외에 무엇이 남습니까.
그 많은 것 - 지식이건 재산이건 -, 그 밖의 다른 재화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이 몸도 버리고 갑니다. 단 한 가지, 나쁜 업이건 좋은 업이건 평소에 지은 업만이 그림자처럼 따라갑니다. 인도 사람들 표현에 의하면 바로 그것이 다음 생을 이룬다고 합니다.
무엇이든지 갑작스레 되는 것은 없습니다. 차곡차곡 쌓여서 되는 겁니다. 서너 살짜리 어린아이가 연주를 하고 작곡을 하는 것은 갑자기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전생에 쌓은 역량이 어떤 계기에 싹이 트는 겁니다. 비근한 예로 스님들 중 금생에 처음 출가한 사람들은 쉽게 정착하지 못합니다. 20-30년이나 승가에 몸담았으면서도 택시기사로 돌아가는 것을 보십시오. 하지만 열 생을 이 길에서 닦은 사람은 죽어도 떠나지 않습니다. 업이란 그런 겁니다.
출가자를 모집한다는 광고 보신 분 있습니까. 부처님 당시에도 그런 광고는 없었습니다. 누구나 오라하지 않는데 때가 되면 한 생각 내어서 제 발로 걸어서 옵니다. 한 생각 일으키면 누가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자신은 한시가 바쁩니다. 다 전생에 익힌 소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수행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습니다. 익히기 나름입니다.
하루하루 어떤 마음을 가지고 어떤 말을 하느냐,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가 곧 이 다음의 나를 형성합니다. 무엇이, 누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가 이 다음의 나를 그렇게 만들고 있음을 바로 아십시오.
길상사를 일부에서 부자절이라고 한다니, 과연 부자절 소리를 들을만한가 반성해야 합니다.
이 절에서 수행하시는 스님들과 여기 다니는 신도들이 함께 반성해야 합니다.
과연 길상사가 부자절이라고 부를만한 절인가. 어려운 이웃들을 보살피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 그리고 청정한 수행과 올바른 교화로서 많이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도량이 될 때, 그 때 비로소 그 이름답게 길상스러운 부자절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모든 분들 부자가 되기보다는 잘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저는 바랍니다.
부자스럽지 않게 잘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