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마음은 닦는 게 아니라, 쓰는 거라오”
법랍 50세를 맞는 법정 스님. 그는 12일 동안거 해제 법문을 통해 “굳은 마음을 활짝 열어 내 인생의 새 봄날을 맞자”고 당부했다. 홍진환 기자
《더는 나눌 것이 없다고 생각될 때도 나누라. 아무리 가난해도 마음이 있는 한 나눌 것은 있다.
근원적인 마음을 나눌 때 물질적인 것은 자연히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그렇게 함으로써 내 자신이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세속적인 계산법으로 는 나눠 가질수록 잔액이 줄어들 것 같지만 출세간적인 입장에선 나눌수록 더 풍요로워진다.
-잠언집 ‘살아있는 것은 다…’ 중에서》
“법랍 50에 이룬 게 뭐냐고? 허허, ‘현재의 나’지.”
‘무소유’와 ‘다 비우고 떠나기’를 실천해 온 법정(法頂) 스님이 올해 법랍(계를 받은 이후 햇수) 50세를 맞았다. 1954년 출가한 스님은 56년 사미계(예비 승려)를 받았다. 12일 서울 성북구 성북동의 길상사에 동안거(冬安居) 해제 법문을 하러 온 스님을 만나 50년 세월의 소감을 물었다.
“재산 명성 이런 건 생애에서 이룬 게 아니지. 죽고 갈 때 가져가는 것도 아닌데. 내가 이뤄 놓은 건 현재의 나밖에 없어. 내가 남에게 덕을 베풀고 있는지, 해를 끼치고 있는지 살펴보면 내가 제대로 살아 왔나 알 수 있지.”
스님은 “수행자에게는 세월이 붙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며 “과거를 회상하거나 불확실한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최대한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유신 시절 불교신문에 베트남전 파병 반대 글을 썼다가 승적이 박탈될 뻔한 일화를 언급하며 당시 자신이 증오심으로 상대를 대하는 것을 깨닫고는 제도권 불교와 인연을 끊었다고 회고했다.
스님이 세상을 향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한 프랑스인 철학자의 질문에 있었다. 당시 송광사 불일암에 머물던 그에게 철학자는 “도대체 이런 외진 곳에서 지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물었다.
“그때 난 ‘나도 모른다. 내 식대로 살 뿐이다’라고 답했지만 내 삶이 사회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반성하게 됐지. 산중 살림을 나누고 싶은 소망에서 되지도 않는 글을 쓰기 시작했어.”
젊었을 때 강직하기로 유명했던 스님이 요즘 많이 부드러워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고 전하자 스님은 미소 지었다.
“젊었을 때는 가까이 하면 베일 것 같다는 소리를 들었지. 풋중일 때는 출가의 긴장감이 살아 있어서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가 있었던 것 같아.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안팎을 살피고 스스로 분수에 맞는지를 따지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하지. 그러면 내 따뜻한 가슴을 저절로 이웃과 나누고 싶어져.”
스님은 이날 해제 법문에서도 ‘마음은 닦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길상사에 모인 500여 명의 청중에게 “마음은 물과 같아서(심여수·心如水), 흐르고 있어야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데 꽁꽁 언 얼음처럼 되면 바늘 하나 꽂기도 힘들다”며 “마음을 쓰는 대상인 가족이나 이웃에게 항상 긍정적으로 마음을 쓰면 내 삶이 덩달아 달라진다”고 설법했다.
스님의 법랍 50세를 기념해 그동안의 법문과 산문집에서 좋은 글귀 130여 편을 골라 모은 잠언집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조화로운삶·9800원)도 12일 출간됐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행복을 기원하는 이 책은 무소유, 단순함과 간소함, 홀로 있음, 침묵, 진리에 이르는 길과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등 법정 스님 생각의 정수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책은 미국 일본 중국 대만 등 4개국에서 번역 출판될 예정이다. 4월 중에는 그동안 쓴 산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글을 스님이 직접 골라 엮은 선집도 출간된다.
서정보 기자 suhcho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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