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늙어 가는 지 밖으로 돌렸던 눈길을 요즘은 내 안으로 거두어들이고 있다. 그리고 삶의 진실을 내 마음과 몸에서 찾으려고 한다.
자다가 내 기침소리를 듣고 깨어나 좌정(坐定)을 하고 기침이 잦아질 때를 기다리면서 이 일 저 일 지나온 세월을 헤아린다. 둘레의 고마운 은혜 속에 살아오면서 내 자신은 과연 그런 은혜에 얼마만큼 보답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본다. 그리고 내게 허락된 시간의 잔고가 얼마쯤 남아있는지도 생각해 본다.
나는 기침으로 인한 한밤중의 이 P좌정Q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 오히려 즐기고 있다. 별처럼 초롱초롱한 맑은 정신으로 내 자신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때로는 등잔을 켜 읽고 싶은 글을 뒤적거리기도 한다. 한낮의 정진보다 한밤중의 이 깨어 있음에서 나는 삶의 투명한 기쁨을 누리고 있다. 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 밤중에 나를 깨워줄 것인가. 이래서 기침에게도 때로는 감사하고 싶다.
이와 같이 늙어감이란 둘레의 여건이나 사물을 거부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임이다. 언젠가는 이 다음 생의 시작인 그 죽음까지도 순순히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자연계에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이 있듯이 우리들의 인생에도 사계절이 있다. 그러나 자연계와 다르다면 우리들 삶에는 개인의 의지적인 노력에 따라 그 사계가 순환적이지만 않고 동시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육신의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무슨 일이건 그것이 삶의 충만이 될 수 있다면 새로 시작하는 그 때가 바로 그 인생의 씨 뿌리는 봄일 것이다.
내가 아는 올해 85세인 어떤 학자는 불교의 원형을 알고 싶어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있다. 또 어떤 분은 정년 퇴임 후 대학원에 들어가 평소 배우고 싶었던 분야를 공부하고 있다. 금년 90세인 한 할머니는 지금도 벼루에 먹을 갈아 붓으로 또박또박 경전을 베끼는 일로 자신을 닦아나가고 있다.
육신으로는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이 분들을 어떻게 파장의 인생이라고 밀어낼 수 있겠는가.
살 줄을 아는 사람은 늙어감에 따라 그의 인생도 잘 익어 향기로운 열매처럼 성숙하게 된다.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그 나이만큼 성숙해져야 한다고 주장해온 바이지만 내 자신은 과연 성숙의 길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 묻고 되돌아본다.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다.
머리카락이 희다고 해서
덕 있는 노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지 나이만 먹었다면
그는 부질없이 늙어버린 속 빈 늙은이
세상의 진실과 진정한 도리
불살생과 절제와 자제로써
번뇌를 말끔히 씻어버린 사람을
진정으로 덕 있는 노인이라 한다
다음과 같은 교훈도 있다.
배움이 적은 사람은
황소처럼 늙어간다
육신의 살은 찌지만
그의 지혜는 자라지 않는다.
젊었을 때 수행하지 않고
정신적인 보배를 얻어놓지 못한 사람은
고기 없는 못가의 늙은 백로처럼
쓸쓸히 죽어갈 것이다.
젊었을 때 수행하지 않고
정신적인 보배를 얻어놓지 못한 사람은
부러진 활처럼 누워
부질없이 지난 날을 탄식하리라.
사람은 누구나 세월의 물결에 실려 늙는다. 늙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의 흐름이다. 나이 먹을수록 정정한 나무처럼 그 기상과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수많은 세월 속에서 터득한 삶의 운치를 지닐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 인생의 향기와 멋이다.
옛 수행자는 P멋을 아는 사람Q을 두고 이와 같이 읊었다.
고요한 달밤 거문고를 안고 오는 이나
단소를 들고 오는 벗이 있거든
굳이 줄을 골라 가락을 듣지 않아도 좋다.
이른 새벽 홀로 앉아 향을 사르고
창문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볼 줄 아는 이라면
굳이 경전을 펼치지 않아도 좋다.
저문 봄날 지는 꽃잎을 보고
두견새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이라면
굳이 시인이 아니라도 좋다.
이른 아침 세숫물로 화분을 적시며
난초잎을 손질할 줄 아는 이라면
굳이 화가가 아니라도 좋다.
구름을 찾아가다가 바랑을 베고
바위에 기대어 잠든 스님을 보거든
굳이 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아도 좋다.
해 저문 들길에서 나그네를 만나거든
어디서 오는 누구인지 물을 것 없이
굳이 덧없는 세상일을 들추지 않아도 좋다.
당신은 자신의 인생에 어떤 운치와 멋을 가꾸고 있는가. 삶의 운치와 멋을 지닌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아름다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