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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2-03-07

    2002.2.17 법정스님 정기법회 법문

본문

설 잘 세셨습니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마음먹은 일들 두루 성취하십시오-.

집에서 나올 때 문단속 잘 하셨어요? 가스도 잘 잠그시고?

왜 제가 이런 소리를 벽초부터 하느가 하면 저도 나올 때 쇠를 채우고 나옵니다. 쇠를 채우고 나올 때마다 찜찜합니다. 중이 잃어버릴 것이 무엇이 있다고 쇠를 재우느냐고요.

이것은 하나의 습관입니다. 세상에 대한 불신입니다.

우리가 처음 절에 들어왔을 때, 사십여 년 전, 절 법당에 쇠를 채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개인 방사에도 쇠를 채우는 일이 없었습니다. 그후로 자꾸 인심이 나빠지고 사람이 법당에 와서 탱화나 불상을 훔쳐 가는 일들 때문에 쇠를 채우게 됐습니다. 저도 처음 불일암을 짓고 살 때 쇠를 채우지 않았습니다. 쇠 채울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무례한 사람들이 들어와서 해짓는 바람에 쇠를 채우게 됐습니다.

강원도에 살면서도, 잃어버릴 것이 없는 데도, 습관입니다. 쇠를 채울 때마다 늘 마음에 저항을 느낍니다.

만장회도(漫藏誨盜)라는 말은 문단속을 잘 하지 않는 것은 도둑질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옛말입니다. 문단속을 하지 않았기 대문에 허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눈에 띰으로서 탐심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단속해야 할 것은 따로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_ 한 생각 불쑥 일어나는데서 온갖 갈등과 시비, 생사의 갈림길이 벌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진짜 단속할 것은 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한 평의 당 뙤기를 울타리를 치고 이것은 내것이야"한 날부터 그의 불행은 시작됐답니다. 이와 같은 소유관념 때문에 타인을 경계하게 되고 잠재적인 침입자로 여겨집니다.

인심이 흉흉한 도시에서는 한시라도 마음놓고 살 수 없기에 문단속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집문 밖에 나가서 어떤 일을 당할지 어떤 마음을 쓸지 모릅니다.


내가 20여 년 전 미국에 갔을 때 가장 감명 깊게 인상을 받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빌딩, 도로 등 잘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스엔젤레스 중심가였습니다. 한 거지가 누더기를 입고 걸어가는데, 체격도 좋아요, 그렇게 당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길을 가는 모습이 어떤 나라 대통령도 제왕도 그렇게 당당하게 걸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그 모습을 한참 보았습니다. 어디서 저렇게 당당한 모습이 나올 수 있을까 하고요. 그는 마음에 꺼릴 것이 없기 때문에 당당하게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있는 그대로 자기 존재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이나 그것이 물질이건 집이나, 가구, 명예든 많이 가지면 가진 만큼 얽히게 됩니다.

소유의 대상으로 부터 소유를 당하게 됩니다.


최근에 책에서 이런 것을 읽았습니다.


회교도인 한 노인은 태어나면서부터 시각장애인입니다.가난한 동네 쓰레기 더미 옆에 널빤지를 깔고 세상의 소리를 듣는 것으로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앞을 지나다가

"할아버지 어떻게 지내세요"하고 물으면서 인사를 하게 되면 이가 다 빠진 입가에 금새 미소가 번지면서 노래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합니다.

"둘레에 온갖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 알라신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닭 우는소리가 들리고 어린애 고함소리,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동네 사람들끼리 인사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해는 따듯하게 비쳐주지요, 바람은 시원하게 불어주지요, 이웃들은 저에게 먹을 것을 갖다줍니다. 나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시각장애자 노인은 이런 소리를 하고 있지요.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부족한 것이 없어요. 그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그 무엇에도 소유당하지 않고 자기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족하고 있습니다. 그는 쓰레게 더미 속에 있으면서 어떤 부자 못지 않게 충만한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상황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바 무스타파입니다.

또한 병든 넝마주이 할머니는 쓰레기 가득한 오두막집에서 어느 날 아들과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어느 자선기관에서 노인을 위한 기숙사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곳은 깨끗한 침대와 좋은 음식과 돌보아주는 사람들이 딸립니다. 그 자선기관에서 그 할머니를 입주시키고자 합니다. 그 할머니는 아들에게 눈길을 돌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내가 어떻게 너를 떠나 살 수 있겠니"

그 아들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어머니, 함께 있어요"

비록 누추한 오두막집에서 병든 몸으로 살지라도 모자간에 따뜻한 정을 나누며 사는 것이 여건이 좋은 자선기관에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들은 앞에 말한 시각장애인 노인과 넝마주이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저 불쌍하고 안됐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풍요로운 삶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많은 것을 갖고 있습니다. 소비문화 속에서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풍족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진 것만큼 행복한가? 그 노인들이 누리는 내면의 편안을 누리고 지내고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왜 저가 이런 불우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예로 드는가 하면 우리들과 너무나 상황이 다릅니다. 우리들이 볼 때는 너무나 비극적이고 불행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거의 자족하는 것이지요. 아무 것도 부족한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거의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있습니다. 또 모자간에 따뜻한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것이 없습니다. 가진 것은 많지마는 그런 따뜻한 정이 사라져갑니다.

이웃과 교감은 무엇입까? 이것은 에짚트에 실재 있었던 이야기 입니다.


곁에 사랍들 얼굴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모두가 달라요. 형제끼리 비슷할 수는 있어도 똑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으로 초대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남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비교하면 상품입니다. 내 처지와 남의 처지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비교하면 자칫 시새우게 됩니다. 나보다 덜 가진 사람에게 우월감을 갖게 됩니다. 시새움과 우월감은 행복이 아니고 불행의 시작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그의 분수에 맞는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그 사람만이 짊어진 짐이 있습니다. 또 몫이 있습니다.그 짐과 몫을 알아야 합니다. 남의 짐과 몫을 넘어다보지 마십시오.

어떤 방법으로 자신의 길을 가느냐에 따라 행복의 비결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길을 가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마음이 열려야 합니다. 겹겹이 닫힌 마음으로서는 자신의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이웃과 교감을 통해서 정을 나눔으로서 마음이 열립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마음을 열어서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는 마음의 평화를 잃지 않게 됩니다. 공연히 남과 비교하니까 원망하게 되고 시새우게 됩니다. 배가 아프게 되고 그렇습니다.

행복은 마음의 평화를 통해서 싹이 틉니다.

앞의 두 노인의 경우를 보십시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도 그것이 충만한 삶입니다. 우리는 잔뜩 차지하고 있으면서 그런 충만한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해서 혼자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 개별적인 환경에 있으면서도 사람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저는 늘 그것을 의식합니다. 떨어져 있으면서 얽혀있습니다.

사람 인(人)자를 보십시오. 서로 의지해 있습니다. 서로 받쳐주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입니다.

이웃과 정을 나눌 수 있어야 됩니다.

만족도 고마움도 느끼지 못하는 소비문화 사회는 얼마나 비정합니까. 너무 건조합니다. 끝이 없습니다. 아무리 사들여도 끝이 없습니다. 고마움이 없지요.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보살도 없습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와 보살이 할 일이 없습니다.

할 일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웃이 내 복밭입니다. 귀찮게 생각지 마십시오. 또 뜯어로 왔구나 하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나는 친구들에게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지요" 그 복은 누가 줍니까. 하나님이나 부처님이 주지 않습니다. 이웃을 통해서 복 받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 복이 내게 옵니다. 오늘날처럼 비정하고 냉혹한 세태에 우리가 사람의 자리를 잃지 않고 지키려면 만나는 세상마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여야 합니다. 저도 새벽예불 후에 "만나는 사람마다 보다 친절하게 따뜻하게 하리다"하고 스스로 마음 다짐하곤 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면 마음밭에 씨가 뿌려져서 자발적으로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부처나 예수나 모든 성인의 가르침을 보면 크게 두 가지를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남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보시가 제일 바라밀이라고 하지요. 육 바라밀 중에 첫째 덕목이 보시입니다.

남이 누구입니까.크게 보면 또 다른 나 자신이지요. 몸 무게 얼마, 목소리 등등 이것만이 내가 아니죠. 이런 것들은 나를 이루는 소재일 뿐입니다. 내가 관계된 세계가 나 입니다.

남을 도울 수 없다면 그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남을 도우면 받는 쪽이나 주는 쪽이나 충만해집니다. 줄 때가 받을 때보다 훨씬 충만해집니다. 아까워 하면서 주면 주는 것이 아닙니다.주면 선뜻 주어야 합니다. 주었으면 잊어버려야 합니다. 어디 쓸 것이냐, 어디{느냐는 내가 알 바 아닙니다.

둘째, 우리는 하루에 몇 번씩 거울을 봅니다. 보살님들 거울을 보지요? 그러나 정작 실체인 내면의 속 얼굴을 들여다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거울을 볼 때 거죽만 보지 말고 속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안팍으로 아름다워 질 수 있습니다.


내가 인생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

내가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내가 오늘 만난 이웃을 어떻게 대하였는가?

우리가 주어진 한평생 시간의 잔고는 노소가 없습니다. 순간 순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됩니다. 순간을 고맙게 제대로 받아 쓸 줄 알고 하루 하루 충만한 삶이 될 수 있도록 정진해야 됩니다.

잘 사는 사람은 육신의 나이만 먹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성숙해야 됩니다.

내일 미루지 말고 오늘 살아야 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복이 어디서 오는지 거듭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