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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2-07-17

    김 병 익(문학평론가)이 말하는 법정론

본문

뜻밖의 수확을 얻었다는 말이 어울리련지 모르겠지만

좋은 평론을 어느 불교 사이트에서 읽게되었네요.



< 법정론 >


불교적 지성과 현대적 사랑


이른바 "직업적인 수필가"의 반열에 결코 끼이지 않는 법정은,

그러나 오늘의 우리 수필 문학에서 다음 두 가지점으로 주목받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가 스님이면서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다는 것이 그 첫째인데, 이는 시에서, 이제는 환속한 고은과 탁지현등 몇몇의 승려 시인이 있고 비평에도 김운학이 있지만 수필문학에서는 그가 유일한 존재임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호사가의 관심이 아니다.

불승이 갖는체험, 그들이 탐구하는 세계는 불교문화가 지배적인 전통으로 작용해온 우리에게 가장 깊고 오랜 정신의 편차를 이루어왔다.

하나의 사상, 그것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장 평이하고 명징하며

논리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수필문학에서 정작 그 불교인의 참여가 없었다는 것은 그 사상과 문학을 위해 커다란 손실이었다.

법정은 그 공백을 채워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불승이라는 것 이상으로 더 중요한 둘째 점은

그의 작품에서 어렵지 않게 규지할수 있는 그의 수필정신이다.

아마 여기에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수필"문학은 우리에게있어 흔히 자음 그대로 청천이 말한바 "붓 가는 대로"란 것으로 규정되어왔다.

청천의 진의가 어디 있든 이 말이 "에세이 문학"을 상당히 무책임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다.

환언하면 수필은 붓 가는 대로, 생각이 떠오르는 대로, 말이 씌어지는 대로 따르는 것이 본의라고 생각되어온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수필문학을 소녀적인 감상 어린 고백, 어쩌다 만나는 우연한 사건의 체험담, 혹은 전문적인 직종을 가진 사람의 산문적인 보고로 추락시킨 것이다.


물론 이런 글들이 수필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데카르트의 방법론으로부터 카뮈의 "시시포스의 설화"가 에세이라는 점에 상도할 때 이런 유의 글들이 그 사상이나 언어에서 얼마나 수필정신을 배반하고 있는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이 세계와 삶에 대한 고도로 세련된 지적통찰의 한 표현인 것이다.

이 두 개의 관점은 결과적으로 법정의 불교적 지성을 존중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실 인간 법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가 비록 삭발을 하고 가사를 입었지만 그의 얼굴이 선승의 모습이라기보다 예리한 지식인의 그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볼 것이다.

이는 또한 그의 인상만이 아니다.

그가 여러 차례 참여하는 불교인으로서, 불교계를 대표한 유일한 저항적 지식인으로서 활약했고 그 때문에 수난도 적지않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는 한국 불교 자체의 타락을 공격했고 나아가 한국사회의 의롭지 못한 것들을 비판했다.

불교의 안과 밖에서 그는 디센더로서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불교사 1600년 동안 호국신앙을 제외한 현실 참여의 예가 극히 적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불교적 현실관의 개조를 위해 매우 고무적인 징조다.

입산속리하여 면벽좌선한다는 것이 득도의 진수인가?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해의 존재가 새삼 기억되어 압박해오는 이제, 불교인의 현실적

각성과 실천적 행동은 결코 도외할 수 없는 명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법정 스스로 "함께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지금 어디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건 아랑곳없이 초연하려는 종교인이 있다면, 그가 소속한 종교는 현상 밖에서 말라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이 시대의 불교도들이 나무

아미타불을 입으로만 외고 몸소 행동하지 않을 때, 골목 안 꼬마들한테서만이 아니고 수많은 대중들로부터 날아오는 돌팔매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나무아미타불)라고 외친다.


여기서 그는 돌팔매란 기독교 성서의 용어를 썼지만 그의 짧고 긴 많은 글들은 그 감수성과 사상의 근거가 불학에만 멈추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컨대 카뮈가 인용되고 베토벤이 감상되며 간디에서 교훈을 얻고 워즈워스가 애송되며 막스 밀러의 말이 회상되고 드디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불교의 진리는 서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 지적은 그가 박학하다든지 서구 문명에 경도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불교 자체가 반지성이란 말은 더욱 아니다.

그것은 그가 하나의 사물 혹은 사건을 바라보고 그 의미를 추구하는 데 있어 불교라든지 기독교라든지 하는, 어떤 한쪽에 편집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건강한 지성이란 아마 이런 사고유형을 말할 것이다.

법정은 승복차림으로 영화를 보는 것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인간이 달에 착륙했는데도 조금도 경이스럽게 느끼지 않는다.

그는 자유롭게 생각하고 명쾌하게 해부한다.

그의 수필집 "영혼의 모음"(73년) 전편을 훑어볼 때 나타나는 다음 두 가지 정신적 특징은 그가 서구적 의미에서의 지성인임을 방증한다.

즉 하나는 그가 승려임을 의식하면서도 "색즉시공"이라든지 "허무"와 같은 불교언어가 거의 보이지 않고 그 대신 "영원"이나 "근원"이란 어휘가 강한 설득력을 갖는다는 점이다.

또 다른 하나는 여래의 자비가 그에게 서구적인 사랑의 어감으로

윤색되고 있으며 그것은 생 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대한 맹렬한 경사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그가 이 책을 자기에게 소개해준 사람을 "한평생 잊을 수 없는 고마운 벗"이라고 감사하며 30여권을 이웃에게 선사했고 이 책에 감응을 받지 않는 사람과는 더불어 상대할 수 없다고까지 열애한다는 것은 "어린왕자"의 사랑이 기독교적 전통의 산물이라는 점과 연결시킬 때 결코 범상한 승려가 아님을 시사한다.

그의 지성이 어디서 발원했든 법정에게서 가장 탁월한 것은, 가령 서울의 불구적인 근대화를 꼬집은 "너무 일찍 나왔군"이나 도시의 소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불국사행 고속버스를 탔으나 끊임없이 틀어대는 카세트 유행가 때문에 오히려 소음기행을 했다는 탄식으로부터, 꽃피는 모습

에서 일대사건을 발견하는 "순수한 모순"에 이르기까지 사건과 사물의 대상을 반대편에서재검하는 아이러니 정신이다.

그는 방패를 보면서 그것을 뚫는 창을 생각하고 창을 보며 그걸 막는 방

패를 예상한다.


침묵을 배경으로 하지 않은 언어는 사실 소음이나 다름없다........(중략).........우리의 영혼을 뒤흔드는 말은 장엄한 음악처럼 침묵에서 나와 침묵으로 사라져 간다.(비가 내린다)


모진 비바람에도 끄떡 않던 아름드리 나무들이, 꿋꿋하게 고집스럽기만 하던 그 소나무들이 눈이 내려 덮이면 꺾이게 된다.

가지 끝에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그 하얀 눈에 꺾이고 마는 것이다.

깊은 밤, 이 골짝 저 골짝에서 나무들이 꺽이는 메아리가 울려올 때 우리들은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정정한 나무들이 부드러운 것에 넘어지는 그 의미 때문일까. 산은 한겨울이 지나면 앓고 난 얼굴처럼 수척하다.(운해목)


세계에 대한 모순적 인식은 변증적 사고의 출발일 것이며 가장 예리한 지성의 능력일 것이다.

그의 많은 현실적, 종교적, 언어적비판은 이 모순의 파악에서 적용받는다.

그리하여 그가 "무소우"에서


우리들이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이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엔가에 얽매인다는 것이다.

라고 말할 때 그것은 현실적인 교훈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난초에 얽매이며 그것에 편집될때, 마침내 애지중지 키워오던

그 난초를 친구에게 주어버리고 홀가분한 해방감을 누리게 되었을때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결심하며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중략)......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역리이니까.

의 결론을 얻는데, 이에 이르러 모순이 종교적 각성의 차원으로 상승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된다.

사실 그의 작품들은 불교 자체를 주제로 한 것이 많으며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불교적 어휘가 빈번히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더 주목할 것은 그에게 주요한 모티브로 사용되고 있는 "모순"또는 "역리"의 사상 근저에는 불교의 세계관이 깊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그의 사상이 서구정신으로 상당히 침윤되어 있으며 "자비"보다 "사랑"을 더 아름답게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 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다"(탁상시계 이야기)고 자기 반성 내지 확인을 부단히 재촉한다거나 "읽는다는 것은 .......다른 목소리를 통해 나 자신의 근원적인 음성을 듣는 일이 아닐까"(그 여름에 읽은 책)라며 내적 대화를 강조하는 것은 불교의 득도관을 현대 언어로 표현한 것임에 틀림없다.

더욱이 무더운 여름날 화엄경을 읽으며 변소에서 역겨운 냄새가 풍겨올 때 "내 몸 안에도 자가용 변소가 있지 않느냐, 사람의 양심이 썩는 냄새보다는 그래도 낫지 안느냐"며 견디어내고 "일체가 유심소조"라고 생각을 돌리는 것은 불교적 체관, 극도의 유심주의의 한 세속적 편린에 불과하다.

이렇게 볼 때 법정의 에세이 정신은 심산유곡의 불심, 고색창연한 불교신앙을 오늘의 이 현실, 끊임없이 사랑과 증오의 사상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이 세계로 끌어내온 것이다.

그는 전통신앙으로부터 거의 절연된 현대의 사상시장에 새로 옷 입힌 불교의 정신을 내놓은 포교사이기도 하다.

그의 수필이 대부분 짤막하며 일상의 단상 내지 세속잡사에 대한 수감이지만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이 편린들을 통해 새로이 발견하는 불교의 현대적 모습이다.

그를 통해 나타나는 불교는 체념과 도피, 초속과 허무의 그것이 아니라 경이롭게 바라보고 자기 삶의 확대로 체득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다.

절의 뜰에 핀 양귀비를 보았을 때 느낀 다음과 같은 정서는 이 세계의

가장 내밀한 부분과 통정하는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것은 경이였다.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었다....

...(중략).......

아름다움이란 떨림이요 기쁨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순수한 모순)


김 병 익(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