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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2-06-27

    2002. 6.16 법정스님 정기법회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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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 6.16 법정스님 정기법회 법문


잘 들 지냈습니까.

아침에 나오면서, 안보고 안들어니까 바로 그 자리가 극락세계가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보고 들으면 분별이 따르지요.

월드컵에 관심이 없으면 국민이 아니라 하니까, 애국심이란 것이 좋은 것도 있지만 또한 사람을 갈라놓아요. 어떤 의미에서는 소리 없는 전쟁이죠. 언론에서 하도 떠들어대니까 국민의 성원이 있으니까 16강, 8강, 요꼬하마에 까지 갈 수 있을 거에요.


혹시 이런 의문을 가진 적이 있습니까? 저는 가끔 이런 의문을 가집니다.

왜 내가 중노릇을 하고 있지?

왜 내가 절에 다니는가?

왜 내가 기도하는가?


자기가 하는 일에 의문을 가지세요. 습관적으로 절에 다니지 마세요.

경전이나 어록마다 "밖에서 찾지 말라. 자기 안에서 찾아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제자가 부지런히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을 보자 스승이 제자에게 묻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을 해서 무엇하게?"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제자의 솔직한 대답이었고 수행의 목적이 어디 있는가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날 스승은 제자가 좌선을 하고 있는 앞에서 바위에 벽돌을 갈고 있었습니다.

제자는 스승에게 여쭈었습니다.

"벽돌을 갈아 무엇하게요?"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다니요?"

"그래, 앉아만 있으면 부처가 될 줄 아는가?"


무엇을 위해서 좌선을 하는가,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앉아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을 대오선(待悟禪)이라고 있습니다. 마치 낚시꾼이 고기가 물 것을 기다리듯이...


스승의 말에 제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스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앉아만 있으면 안됩니다.

"소-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수레를 몰아야 하는가? 소를 몰아야 하는가?"

진정한 선은 안거나 눕는데 상관이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어야 합니다.

남악 회황 선사와 제자 마조 도일의 이야기입니다.

정진에 대해서

첫째- 좌선, 기도란 무엇이 되기 위해서, 어떤 영험을 바라고 하는 것은 잘 못된 것입니다. 무심히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지, 어떤 일을 하면서도 얽매이지 않는 충만된 존재의 경지라야 합니다. 화엄경에 유희삼매라는 말이 있습니다.어린아이가 소꿉장난 하듯이, 그 일을 하는 자체를 모르듯이 기도 그 자체가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합니다.

둘째- 좌선을 하여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좌선 그대로가 부처의 경지입니다. 부처와 보살의 행위입니다. 그 태도가 무애삼매의 경지이지요. 무엇이 되기 위한 수단이 아니며 목적과 수단이 둘로 나뉘어져 있는 거이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순간 순간 삶 전체가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절에서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기도는 진정한 기도가 아닙니다.

지장보살을 기도한다면 곳곳에 살아있는 지장보살을 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슨 일에나 공을 들여야 합니다. 성급하게 서두러면 그르칩니다. 3. 7 일 기도 드렸드니 영험이 없더라 이런 말을 해서는 안됩니다.

몇 생을 거치면서 허송세월을 했는데 어떻게 한 두 달 안에 이룰 수 있겠습니까. 씨를 뿌렸으면 싹이 나고 움이 돋도록 행야 합니다.

정진하는 사람은 시간의 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시간을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시절인연을 막연히 기다릴 것이 아니라 내가 순간 순간 만들어 가야 합니다.

좌선은 습성이 아닙니다. 좌선은 그 자체가 대 안락의 법문입니다. 좌선은 때묻지 않는 닦음입니다. 본래 청정하지만 닦지 않으면 더러워 집니다. 맑게 닦아 논 유리창을 보십시오. 그대로 두면 먼지투성이가 됩니다. 우리 마음도 닦지 않으면 더렵혀집니다.

기도하고 참선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부처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 청정함을 드러내기 위하여 정진하는 것입니다.

선종사에 약산스님이라고 있습니다. 석두스님의 제자입니다.

제자가 좌선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스승은

"어이, 자네, 그 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가히 앉아 있단 말인가?"

"한가히 앉아 있다면 무엇인가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자네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다는데 무엇을 하지 않는단 말인가?"

"이 경지는 일 천 부처님도 알지 못합니다"

말로서 표현할 수 없는 경지를 말합니다. 한 곳에 순수하게 몰입하고 있는 것은 아름답습니다. 한가지 일에 열중하는 농부나 뜨게질하는 아낙도 아름답습니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말없이 자신이 지니고 있는 속 뜰을 활짝 열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든 봉사를 하든 지속되어야 합니다.

옛사람들은 한가지 일을 10년은 했었지요. 하는 일과 내 자신이 하나가 되어야 하지요.

이런 경지는 살아 있는 부처와 깨어있는 보살의 대 안락의 경지입니다.

이런 것들이

왜 내가 중이 되었는가? 왜 절에 다니는가? 왜 내가 기도를 하는가?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것입니다.

약산스님의 명성을 듣고 지방장관 이고라는 사람이 스님을 뵈러왔습니다. 스님은 본체만체 했습니다.

이고는 기분이 나뻐서 스님 들어라고

"막상 와서 보니 천리 밖에서 소문보다 대단치도 못하구면" 하고 말했습니다.

스님은

"그대는 어찌 귀만 소중하게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는가!"

그때야 이고는 예를 갖추어

"어떤 것이 도입니까?"

스님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옆에 있는 경을 가리키며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

이고는 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진리는 별 것 아니다.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는 모든 사물이다. 평상심이 도(불법)이다.

내 집안에서, 내 일상에서 있지,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

내 마음이 여래장이고 무진장입니다.

지장기도 드리려면 24시간 지장보살을 만나야 합니다. 내 자신이 지장보살이 되어야 합니다.


건강한 여름 보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