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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2-09-05

    생태윤리를 실천하자 - 法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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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고 향기롭게 소식지 9월호 - 산방한담


생태윤리를 실천하자


法頂(회주스님)


지난 여름의 폭우로 인해 개울이 많이 씻겨 나갔다.

반석이 드러날 만큼 말끔해졌다. 나 혼자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는 개울가의 커다란 돌덩이가 어디론지 사라지고 없다.

물의 부력과 유속(流速)이 가져온 변화다.


해마다 되풀이되는 일인데 홍수가 났을 때 강물에 떠내려가는 온갖 쓰레기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현주소를 실감한다.

‘대~한민국’을 아무리 소리 높이 외쳐본들 쓰레기 하나 제대로 치우지 못한다면 4강 아니라 우승을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휴가철이면 덜된 인종들이 여기저기 함부로 버리고 간 쓰레기를 집중호우가 아니면 누가 치워 주겠는가.

흔히 기상이변이니 자연재해니 하지만 그 이면에는 인간들이 저질러 놓은 재앙이 작용하고 있다.


휴가철 고속도로와 국도마다 꽉 메운 자동차들이 평소 두세 시간이면 갈 거리를 열 시간, 열두 시간이 걸려야 겨우 닿을 수 있다.

그 많은 자동차들이 내뿜는 배기가스가 어디로 가겠는가.

그게 오염된 구름층을 이루어 대기를 불안정하게 함으로써 이른바 게릴라성 호우로 쏟아 붓는다.


자연은 그 나름의 질서를 지니고 있다.

스스로 정화하는 자정능력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현대 과학기술문명이 이 질서와 능력을 파괴하고 있다.

사람의 머리와 손으로 만들어 놓은 문명은 독약이다.

점진적인 독약이다.

과학기술문명의 문제점은 환경오염과 생태계 파괴로 집약된다.


장자(莊子) 외편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한 노인이 밭을 경작하는데 항아리에 물을 길어다 밭고랑에 붓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힘만 들지 일에 진척이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한 나그네가 말했다.


“어째서 양수기를 사용하지 않습니까?”

노인은 대답했다.


“양수기를 이용하면 편리하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소. 그러나 한 번 기계에 맛을 들이면 그 기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소. 기계가 있으면 그에 따라 기계의 일(機事)이 있고, 기계의 일이 있으면 반드시 기계의 마음(機心)이 있소. 기계가 내 마음속에 들어오면 순박함을 잃게 되오.

순박하지 못하면 정신이 안정을 이루지 못하고, 정신이 불안정하면 사람의 도리를 제대로 지킬 수 없는 것이오. 나는 기계의 편리함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쓰지 않소.”


사람들이 기계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이제는 기계가 내리는 결정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컴퓨터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로봇형 인간이 되어간다.


우리가 의지해 살아가는 이 대지는 단순한 흙이 아니다.

흙과 식물과 동물이 서로 주고 받는 조화로운 순환을 통해서 살아 움직이는 에너지의 원천이다.

이와 같은 대지를 함부로 허물고 더럽히면 결국은 사람이 기댈 곳이 사라진다. 대지가 병들면 그 지체인 사람도 온전할 수 없다.


지금 세계 곳곳이 물난리와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

흔히 기상이변 탓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기상이변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헤아려 보아야 한다.

그것은 더 물을 것도 없이 기상 탓이 아니라 사람 탓이다.

이래서 ‘생태윤리’가 절실히 요구되는 현실이다.


한 사람 한 사람, 곧 당신과 내가 이 대지의 건강을 위해 자신의 의무를 깨닫고 실천하는 일이 생태윤리다.

윤리는 글이나 말보다도 실천에 그 의미가 있다.

순간 순간의 사소한 결단에 달려 있다.


생태계 보전의 요점은 간단하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지구 자원은 우리 조상들이 지켜서 남겨준 고마운 유산이다.

그러므로 이 다음 세대(우리들 자신의 내생도 포함된다)의 필요도 생각해야 한다. 지구로부터 얻은 물자를 소중히 다루는 것은 곧 지구 생태계를 돌보는 일이다.


색다른 물건을 보면 거기에 현혹되어 충동적으로 사들이지 말자.

충동구매에는 반드시 후회가 따른다. 그 물건이 지금 당장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만큼 꼭 필요한 것인가를 거듭거듭 물어야 한다.

대형 할인매장을 조심하자. 거기에는 장바구니가 아니라 커다란 손수레가 당신의 자제력을 시험하고 있다.


지난 여름에 내 자신이 저지른 충동구매 한 가지.

지나가다가 냉방장치가 잘 된 할인매장을 기웃거렸더니 중국산 대돗자리가 눈길을 끌었다.

1만 9천원.

침상에 깔면 좋을 것 같아서 샀다. 없어서는 안될 물건도 아닌데 값이 헐하다고 해서다.

날씨가 서늘해지면 대돗자리는 짐스러워질 것이다. 생태윤리에 어긋난 반칙이다.


우리가 자동차를 원하는 것은 그 자체를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장소에 쾌적하고 쉽게 가기 위해서다. 값비싼 자동차를 보고 그의 사회적인 신분이나 부를 생각하기보다는 그것이 일으키는 대기오염과 환경파괴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이것도 하나의 생태윤리이다. 배기량이 적은 차가 환경을 덜 오염시킨다.


광고에 속지 말자.

소비주의를 부추기는 광고는 생태적 위협이다.

광고를 볼 때 거기에 빨려 들지 말고 멀리 내려다 보라.

이 말을 명심하라.

들여다보지 말고 내려다보아야 한다.

들여다보면 광고의 인력에 빨려 들기 쉽다.


우리가 건드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들의 삶은 그만큼 건강하다.

편리하다고 해서 문명의 연장에 너무 의존하면 언젠가 그것으로부터 배반을 당한다. 반드시 당한다.


우리가 살만큼 살다가 돌아가 의지할 곳이 어디인지 이따금 생각해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