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히 귀를 귀울이라
法頂(회주스님)
오두막 이슥한 밤
홀로 앉아 있으니
고요하고 적적해
본래의 자연
무슨 일로 서녘 바람
숲을 흔드는고
외기러기
먼 하늘에 울고 간다.
<금강경 오가해(五家解)>에 실린 야보선사의 송(頌)이다.
요즘 자다가 몇 차례씩 깬다. 쌓인 눈에 비친 달빛이 대낮처럼 밝다.
달빛이 방안에까지 훤히 스며들어 자주 눈을 뜬다.
내 방안에 들어온 손님을 모른 체 할 수 없어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앉는다.
천지간에 아무 소리도 없다. 모든 것이 잠들어 있다.
이 적막강산에 어쩌다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결에 나뭇가지에 쌓인 눈이 흩날리는 소리가 들릴 뿐.
그리고 때로는 내 기침소리에 잠에서 깰 때가 있다. 머리맡에 벗어놓은 누더기를 걸치고 앉는다.
기침이 한밤중에 나를 깨운 까닭을 헤아린다.
한낮의 좌정(坐定)보다 자다가 깬 한밤중의 이 좌정을 나는 즐기고자 한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지 않으니 잠들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소식으로 받아들이면 기침이 오히려 고맙게 여겨질 때가 있다.
맑은 정신이 든다.
중천에 떠 있는 달처럼 내 둘레를 두루두루 비춰주고 싶다.
이 겨울 아침나절, 산중에 피어난 눈꽃은 환상적이다.
언뜻 달밤에 피어 있는 벚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연은 이렇듯 아름답고 신비로운 조화(造化)를 지니고 있다.
그 어떤 화가일지라도 이처럼 완벽한 설경산수는 그릴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은 아무 생각 없이 있는 그대로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
자연은 어떤 분별도 사심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무심히 드러낼 뿐이다.
산중에 있는 어떤 절에 갔더니 한 스님 방에 이름 있는 화가의 산수화가 걸려 있었다. 아주 뛰어난 그림이었다.
그러나 주인과 벽을 잘 못 만나 그 그림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천연 산수가 있는 산중이기 때문에 그 산수를 모방한 그림이 기를 펴지 못한 것이다.
그런 산수화는 자연과 떨어진 도시에 있어야 어울리고 그런 곳에서만 빛을 발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있어야 살아서 숨쉰다.
이런 일이 있었다.
피카소의 그림 한 점이 1백만 불에 팔렸다. 그림을 갖고 싶은 한 귀부인은 그 그림이 진품인지 모조품인지 알 수 없어 망설인다.
한 미술평론가가 그녀에게 말한다.
"이 그림은 진품이 틀림없습니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내가 현장에 있었으니까요."
그는 피카소의 절친한 친구였다.
그의 말을 듣고 귀부인은 그림을 산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그림을 들고 직접 피카소를 찾아간다.
"선생님, 저는 이미 이 그림을 화상에게서 샀으므로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이 그림이 진품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을 뿐입니다."
피카소는 그 그림을 보더니 이상한 대답을 한다. 그 미술평론가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와 동거하던 애인도 그곳에 있었는데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다.
"부인, 이 그림은 진품이 아닙니다."
그러자 피카소의 젊은 애인이 말한다.
"아니 여보, 내가 보는 앞에서 당신은 이 그림을 그렸어요.
그리고 평론가 선생도 그 때 그 자리에 있었구요.
그런데 어떻게 그것이 진품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피카소는 말한다.
"내가 이 그림을 그린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리지널이 아닙니다. 나는 그전에도 그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그 시절에는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똑같은 그림을 반복해서 그렸습니다. 이 그림의 오리지널은 지금 파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여기 위대한 피카소의 참 면목이 있다.
누가 만들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설사 화가 자신이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진짜가 아니고 모조품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에겐 맨 처음에 그린 그림이 오리지널이었다.
그 그림은 자기 존재의 내면에서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그림을 그릴 때 아무 잡념이 없는 무심의 경지에서, 그 자신이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위대한 창조는 무심에서 나온다. 그것은 침묵의 세계이며 텅 빈 충만인 공(空)의 경지다.
야보선사의 노래처럼 고요하고 적적한 것은 자연의 본래 모습이다.
달빛이 산방에 들어와 잠든 나를 깨운 것도, 소리 없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달의 숨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도 이 모두가 무심이다.
바람이 불고, 꽃이 피었다가 지고, 구름이 일고, 안개가 피어오르고, 강물이 얼었다가 풀리는 것도 또한 자연의 무심이다.
이런 일은 그 누가 참견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다만 자연 앞에 무심히 귀를 기울일 뿐이다.
자연의 신비와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면 입 다물고 그저 무심히 귀를 기울이면 된다. 무심히 귀를 기울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