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년을 지킨 산치탑 - 인도기행
법정 스님
불탑(佛塔)으로 유명한 산치는 중인도 마디야 프라데시 주의, 약간 서쪽으로 처진 중앙 주도(州都) 보팔의 북동쪽에 위치한 조그만 시골이다.
부처님이 직접 이 곳을 방문한 적은 없었지만,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이 세운 불탑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2천 년의 세월을 지킨 산치탑 올드델리는 무갈제국 시대의 인도 수도로 타지마할을 만든 5대 황제 샤자한이 1648년 아그라에서 델리 북쪽으로 천도하여 세운 도시다.
뉴델리가 영국 식민통치하에 계획, 건설된 신도시인 반면, 올드델리는 회교제국의 냄새가 짙게 밴 낡고 음산한 도시다.
동서로 드넓게 뻗은 큰 거리 찬드니초크 남쪽에 델리에서 가장 큰 모스크 자마마짓드가 있다. 한꺼번에 2만여 명의 예배자를 수용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회교 사원.
1644년부터 6년 간에 걸쳐 세워진 것인데, 건축광인 샤자한이 세운 마지막 건축물이라고 한다. 그 둘레는 너절하고 우중충한 빈민가와 시장인데 회교도의 거주 지역이다.
아침나절인데도 음산하고 몹시 혼잡스런 이 시장 바닥을 어정거리다가 자마마짓드 왼쪽 길목에 이르러 닭 잡는 광경을 보고 나는 섬뜩했다. 한쪽에서 닭을 칼로 목을 따 죽이면, 바로 곁에서 껍질을 벗기는데, 그런 일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기계적으로 진행하고 있었다.
이 일대가 닭 도살장인 듯 여기저기서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살생을 하는 종교는 온전한 종교가 아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 인도문 곁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을 찾았다.
2층의 아늑한 전시실에는, 서구미술의 영향 아래서도 인도의 전통을 살린 독특한 아름다운 소품들이 관람자의 발길을 머뭇거리게 한다. 인도는 과거의 유물만이 아니라 현대의 아름다움도 가꾸고 간직하는 나라라는 걸 이런 곳에 들를 때마다 확인할 수 있다. 언어의 벽을 뛰어넘은 아름다운 그림 앞에 마주하고 있으면 인류가 비슷한 감성을 지닌 하나의 인간 가족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밤기차로 뉴델리를 떠나 산치로 가야 하기 때문에, 오후에는 인도 정부에서 운영하는 직물가게에 들러 모직으로 된 숄을 하나 샀다. 그리고 인도의 전통적인 문양으로 짠 면직 수건도 몇 장 샀다.
다실용 수건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 어렵게 사는 나라에 와서 무언가 사주고 싶어도 여행자에게는 살 만한 물건이 눈에 띄지 않았다. 역 대합실은 인도 어디서나 늘 그러하듯 사람의 물결로 대혼잡을 이루고 있었다.
열차를 타기 위해 역에 들어설 때마다 이런 광경과 마주치면 여행자는 자연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복작거리는 대합실 한쪽에서 회교도들은 예배시간이 되었는지 바닥에 숄을 깔고 몇 사람이 나란히 서서 그들만의 메카를 향해 엎드려 예배를 드렸다.
신앙이 무어기에 저럴 수 있을까 싶었다. 그러한 신앙이 인간의 이성과 양식을 이탈, 맹신으로 빗나갈 때는 무서운 파괴력을 동반한다.
인류 역사상 무수히 야기된 종교간의 갈등과 분쟁이 바로 그 맹신(盲信)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불탑(佛塔)으로 유명한 산치는 중인도 마디야 프라데시 주의, 약간 서쪽으로 처진 중앙 주도(州都) 보팔의 북동쪽에 위치한 조그만 시골이다.
부처님이 직접 이 곳을 방문한 적은 없었지만, 기원전 3세기 아쇼카왕이 세운 불탑이 비교적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다.
뉴델리에서 산치까지는 급행 열차로 14시간 30분이 걸린다. 인도에서 밤기차를 타고 여행을 해본 사람이면 익히 알고 있겠지만, 숄이나 담요를 뒤집어쓰고 쭈그리고 있거나 누워 있는 모습이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아주 을씨년스럽게 보인다.
보리수나 부처님의 발무늬[足跡], 혹은 법륜(法輪) 등으로 그 정신을 상징...
언젠가도 이야기한 바 있지만, 낮 동안 3층으로 된 자리가 밤이면 등받이를 내려 누울 수 있는 침대로 바뀐다. 덜커덩거리며 몹시 흔들리는 차체와 창틈으로 새어드는 밤바람이 차다.
역에 닿을 때마다 차를 사라고 외쳐대는 목청 높은 ‘차아이’ 소리가 잠을 쫓는다.
나는 5·16 직후 서울에서 밀양까지 밤기차를 탄 후로는 한 번도 밤기차를 타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인도 여행중 몇 차례의 밤기차를 타면서 밤기차 여행이 얼마나 고달픈 행각인가를 뒤늦게 알아차렸다.
그렇지만 귀국하면 요즘 우리 나라의 밤기차는 어떤지 한 번 꼭 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닿고 보니 산치는 듣던 대로 아주 궁벽하고 가난한 시골이었다. 역에서 방을 빌려 짐을 맡겨두고 나오자 맞은편 언덕 위로 산치의 대탑이 멀리 눈에 들어 왔다.
경사가 밋밋한 언덕길을 올라 탑 앞에 마주서니 밤기차에서 묻은 피로도 말끔히 가시었다. 이 고장 탑(스투파)의 모양은 우리와는 달라서, 마치 밥 사발을 엎어놓은 듯하다. 이를 전문 용어로 복발(覆鉢)이라 한다.
산치에는 중요한 스투파만도 3기가 있고, 승원과 불당의 유적은 수십 군데에 이른다. 지금은 보잘 것 없는 가난한 시골이지만, 기원전 3세기에서 12세기까지의 1천 5백년 동안 이곳은 불교의 커다란 센터였음을 짐작케 한다.
승원과 불전은 회교도들의 무자비한 파괴에 의해 지금은 초석만 남아 있고, 한쪽에 깨뜨려진 돌더미가 쌓여 있을 뿐이다. 인간의 이성과 양식을 저버린 그 맹신이, 인류 문화를 이렇듯 무참하게 파괴한 것이다.
3기의 스투파 중에서 제1탑이 가장 크다. 고대 인도 스투파의 전형적인 구조와 균형잡힌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원통형의 기단 위에 반구형(半球型)의 탑신이 있고, 그 꼭대기에는 우산 모양의 산개(傘蓋)와 산간(傘竿)이 세워져 있다.
기단의 둘레에 기단과 탑신이 접하는 중턱을 빙둘러 오르는 길이 있는데, 신자들은 이 길을 돌면서 예배드린다. 이 스투파는 직경이 36m이고, 높이가 16.5m에 이르는 거대한 탑이다. 탑 안에는 물론 부처님의 사리(유골)가 모셔져 있다. 탑에는 원형의 난간이 있고, 동서남북 사방에 탑문이 있는데 그 조각이 아주 아름답다.
내용은 부처님의 일대기와 전생설화로 되어 있으며, 이 스투파가 세워진 기원전 3세기 무렵에는 불상에 대한 신앙이 없었음을 엿볼 수 있다. 불상을 직접 새기지 않고, 보리수나 부처님의 발무늬[足跡], 혹은 법륜(法輪) 등으로 그 정신을 상징하고 있다.
불상이 조각되기는 기원전 1세기 이후다. 인적이 끊긴 이 스투파 그늘에 앉아 내 자신이 무슨 인연으로 불교의 출가승이 되어 이 머나먼 고장에까지 발길이 미치게 되었는가 싶으니 실로 감회가 무량했다.
사람은 저마다 자기 몫의 삶을 지니고 살게 마련인데, 내 삶의 몫이 출세간(出世間)에 있음을 불교 유적지를 순례하면서 그 때마다 거듭 확신할 수 있었다. 맑은 바람이 부는 이 언덕에서 사방을 돌아보면 중인도의 대평원이 아득한 지평선으로 그어져 있다.
눈 아래 내려다보이는 산치 역이 마치 장난감 같다. 그렇다, 저 지평선 너머로 무수히 전개될 인간의 도시도, 우주적인 법계(法界)의 차원에서 보면 한낱 장난감 같은 존재, 언젠가는 우리들의 육신처럼 허물어지고 말 그런 집적(集積)이 아닐까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