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의 3박4일 '소풍'...속가제자의 3박4일 '출가'
[출처: 동아일보]
법정스님은 해마다 서너차례 불일암에 들러 암자 관리 상태
를 살피고 번갈아 가며 암자를 지키는 상좌들을 격려한다.
스님은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올 수 도 있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모든 것은 그저 시절 인연에 따를 뿐”
이라고 했다.오명철기자
《불일암(佛日庵)에 다녀왔다. 전남 승주 조계산(曹溪山) 중턱에 자리한 이 암자는 ‘무소유(無所有)’의 법정(法頂·71) 스님이 1975년 초가을부터 1992년 봄까지 17년간 머물렀던 수행처다. 큰 절인 송광사(松廣寺)에서 이곳 암자까지 이르는 호젓한 오솔길과 댓잎소리, 그리고 단아한 암자 풍경으로 인해 연중 순례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11년 전부터 강원도 산골 화전민이 남기고 간 오두막에서 홀로 지내고 계신 스님은 일년에 서너 차례 이곳에 내려와 사나흘씩 머물며 암자를 둘러보신다. 스님이 모처럼 불일암에 내려와 계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3박4일의 출가(出家)’였다. 스님의 ‘속가제자(俗家弟子)’임을 자처한 지 10년여가 넘었지만 스님과 함께 침식을 같이하며 남도 일대를 두루 둘러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암자에는 마침 스님의 네 번째 상좌(上佐)인 덕현(德賢) 스님과 첫 손(孫) 상좌인 김(金)씨 성을 가진 행자(行者)가 머무르고 있었다. 귀한 인연(因緣)이었다.》
● 수류화개실(水流花開室)
‘법정’이란 이름이 불교계의 양식 있는 지성으로 문명(文名)을 높이고 있을 무렵, 서울 봉은사(奉恩寺) 다래헌(茶來軒)에서 머물던 스님은 돌연 모든 것을 정리해 불일암으로 들어왔다. “이대로 시국 비판이나 하며 글재주만 부리고 있다가는 옳게 중노릇 못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암자를 재건해 수행에 정진하며 자연과의 대화와 독서로 심신을 추슬렀다. 서울에서 원고를 정리해 넘긴 첫 산문집 ‘무소유’를 받아본 곳도 이곳이었다. 이후 ‘서있는 사람들’ ‘물소리 바람소리’ ‘산방한담’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텅 빈 충만’ 등 주옥같은 산문집이 이곳에서 쓰여졌다.
암자를 나서는 법정스님. 스님의 유유자적한 뒷 모습에서 그의
무소유 정신이 느껴진다.오명철기자
어느 순간부터 스님은 이곳을 수류화개실로 부르기 시작했다. ‘물 흐르고 꽃이 피는 곳’이라는 뜻이다. 언젠가 한 독자가 불쑥 불일암을 찾아와 “수류화개실이 어딘가요” 하고 묻기에 스님은 “당신이 어느 곳에 있든지 착하고 성실하게 지내면 그곳이 바로 수류화개실”이라고 답해 주었다.
위채는 스님의 침실 겸 서실(書室)이고, 아래채는 객실과 부엌으로 쓰고 있다. 몇해 전에는 상좌들이 힘을 합쳐 별채인 서전(西殿)을 지었다. 연중 물이 줄거나 늘지 않는 샘터와 대나무를 바라보며 뒷일을 볼 수 있는 해우소(解憂所·화장실)는 암주(庵主)인 스님의 빼어난 안목과 청결함으로 ‘명품(名品)’ 반열에 오른 지 오래다. 위채에는 스님이 직접 옮겨 심은 후박나무가 넉넉한 품새로 조계산을 바라보고 있고 앞뜰에는 파초 도라지 달맞이꽃이 가지런히 심어져 있다. 밤 8시경 달맞이꽃의 개화를 지켜보면서 승속(僧俗)은 일제히 탄성을 터뜨린다. 끝물의 꽃 한 송이가 망울을 터뜨리느라 애쓰는 모습을 애처롭게 보다 못한 스님이 “자, 기운내거라. 밤새 너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고 목소리를 높이자 순간적으로 ‘툭’ 하고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은 그야말로 ‘경이(驚異)’였다.
자살 직전 스님의 책을 읽고 마음을 고쳐먹은 한 남자가 불일암에 올라와 스님께 감사의 큰절을 올리고 돌아갔고, 타 종교 성직자들도 종종 암자에 들러 스님과 차 한잔을 나눈 뒤 돌아가곤 한다. 서울 여의도에 사는 한 노보살은 매달 한 차례씩 이곳에 내려와 해우소를 청소한 뒤 당일 서울로 돌아가는 생활을 20년 가까이 해오고 있다. 아름다운 인연이다.
● 불일암 수칙(守則)
법정스님이 후박나무 곁에서 멀리 조계산 자락을 바라
보고 있다. 스님은 자신이 불일암에 들어와 심은 후박나무가 이처럼
훌쩍 커버린 것을 대견해 하면서 “자녀들이 장성하는 것을
보는 부모의 심정이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오명철기자
스님이 이곳에 계실 때 저녁 해가 떨어진 후에는 어떠한 방문객도 암자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찾아오는 방문객과 독자를 물리치는 일이 가장 어려웠던 일이라고 회고하실 정도다. “수행질서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서는 욕을 먹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스님은 강원도 오두막으로 들어간 이후 번갈아 암자에서 정진하는 상좌들을 위해 5개항의 불일암 수칙을 만들어 지키도록 했다. 1.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인 계행(戒行)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함께 닦는 일로 정진을 삼는다.
2. 도량이 청정하면 불 법 승(佛 法 僧) 삼보가 항상 이 암자에 깃든다. 검소하게 살며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
3.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 잡담으로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침묵의 미덕을 닦는다.
4. 방문객은 흔연히 맞이하되 해 떨어지기 전에 내려가도록 한다. 특히 젊은 여성과는 저녁 공양을 함께 하지 않고 바래다 주거나 재우지 않는다.
5. 부모형제와 친지를 여의고 무엇을 위해 출가 수행자가 되었는지 시시로 그 뜻을 살펴야 한다. 세속적인 인정에 끄달리면 구도정신이 소홀해진다는 옛 교훈을 되새긴다.
고산 윤선도 고택을 둘러 보는 스님. 명가의 후손들이 선조가
남긴 고택과 유품을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을 높이 평가하셨다.
오명철기자
속가의 제자는 특히 4번 수칙을 지키기가 제일 어려울 것 같다며 스님에게 어깃장을 놓는다. 스님은 아무 말씀도 않으시고 미당(未堂)의 시집을 꺼내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를 나지막이 읊조리신다.
‘섭섭하게, 그러나 아조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듯만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하는 이별이게/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 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
● 상좌(上佐)
한사코 상좌들이기를 고사했던 스님은 1983년 첫 상좌 덕조(德祖·서울 성북동 길상사 주지)를 들인 이래 덕자 돌림으로 인(仁) 문(門) 현(賢) 운(耘) 진(眞) 일(日) 등 일곱 제자를 두었다. “내게 계를 주신 효봉대선사(曉峰大禪師)와 시주(施主)들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고 하신다. 하지만 몇해 전 더는 상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상좌 하나가 지옥 한 칸’인데다 굳이 가르칠 것도 없다”는 말씀과 함께.
상좌 중에는 서울대 법대를 나온 이도 있지만 스님은 ‘출신성분’은 일절 염두에 두지 않고 오로지 ‘중노릇 제대로 할 재목인가’만을 따져 상좌를 들였다. 올해 처음으로 맏상좌인 덕조 스님이 상좌를 맞게 됐으니 법맥(法脈)이 3대째로 이어지게 됐다.
지금 불일암에 와있는 행자는 스님의 장(長) 손상좌로 올해 만 스무살이다. 행자는 대학 입학 후 한 학기를 마치고 인터넷 상담을 통해 출가를 결심했다. 인터넷 홈페이지가 있는 다섯 군데 절에 e메일을 보낸 뒤 가장 친절하게 답신을 보내준 덕조 스님을 은사로 삼기로 하고 어느 날 부모님께 편지 한 통을 남긴 뒤 절로 들어왔다고 한다. 밝고 씩씩한데다 힘도 좋고 음식 솜씨도 좋아 스님이 무척 대견해 하신다. 스님은 저녁 공양 후 차 한잔을 마시며 행자에게 “복(福)과 덕(德)의 힘으로 도(道)를 이루는 것이다. 너로 인해 네 도반(道伴)과 이웃에게까지 복과 덕이 미칠 수 있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통뼈에다 어깨가 떡 벌어진 행자는 두 손을 합장하며 감사의 예를 표했다.
● 남도순례(南道巡禮)
불일암 윗채. 스님의 침실 겸 서실이 있는 곳이다. 서실에는
경전 보다 시집과 문학 작품이 더 많다. 앞에 스님이 손수 만
오래된 의자가 보인다.오명철기자
이틀에 걸쳐 스님과 함께 여수 해남 강진의 사찰과 문화 유적지를 두루 둘러봤다. 스님은 내내 운전대를 놓지 않으신다. 평소 스님을 따르는 여수의 원경(圓鏡) 처사 내외와 광주의 월정(月庭) 보살이 현지 안내를 맡았다.
첫날 여수에서 오랜만에 바다 풍광을 구경하기 위해 유람선에 오른 스님은 귀청이 떠나갈 듯 울려나오는 선상 가요와 남을 아랑곳하지 않는 승객들의 고성방가에 금세 눈살을 찌푸리신다. 이전 같으면 당장 일갈을 하셨을 테지만 그럭저럭 참아내신다. 지켜보는 이들이 오히려 조마조마하다. 하지만 1시간여 달려간 돌산도(突山島) 끝자락의 향일암(向日庵) 주변에 국적 불명의 대형 요사채 건물이 떡하니 들어선 것을 보시곤 “중들이 저렇게 안목이 없으니…” 하며 혀를 차신다.
둘째 날은 마음이 많이 편해지셨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18년 유배 생활 중 11년을 보내며 500권의 책을 저술한 강진의 다산초당(茶山草堂)과 고산 윤선도(孤山 尹善道)의 고택인 해남의 녹우당(綠雨堂)을 둘러보며 마음이 누그러지신 듯했다. 어느 핸가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다산초당에 올라 동암(東庵) 마루에 걸터앉아 다산이 이곳에서 자식들에게 보낸 편지를 묶은 책을 펼치니 감회가 남다르더라는 얘기와 함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릇 모든 위대한 것은 역경과 고뇌의 산물”이라고 말씀하신다. 동암에 걸려 있는 다산의 친필이 스님의 글씨체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다산이 바다 건너 흑산도에 귀양 가 있는 둘째 형 약전(若銓)을 그리며 눈물짓곤 했다는 자리에 세워진 천일각(天一閣)에 오르니 주위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서 바닷바람을 벗 삼아 준비해 온 점심과 차를 나눠 먹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스님도 ‘이 밖에 무엇을 더 구하랴(此外何所求)’고 연방 감탄하신다. 녹우당에서는 선조의 유물을 잘 보관, 관리해 온 후손들의 노력을 몇 번이나 칭찬하셨다.
오가는 길에 만난 이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혹시 법정 스님 아니신가요”라고 물을 때 마다 스님은 “저도 그 스님을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고 답하며 웃음으로 지나치신다. 하지만 자신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합장하는 동국대 박상진(朴湘珍) 교수 가족 등에게는 이것저것 관심을 표하시며 기꺼이 기념촬영에도 응해주신다.
● 회향(回向)
마지막 날 스님은 4시간여 차를 몰아 굳이 기자를 서울까지 데려다 주신 후 곧바로 강원도 산골의 오두막으로 내려가셨다. 멀어져 가는 스님의 소형 승용차를 바라보며 “스님, 지금 이 모습 그대로, 그렇게 오래도록 계셔 주세요”라고 기원했다. 올 여름 어느 누가 이보다 더 복되고 소중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랴.
승주=오명철 문화부장 osca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