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계룡산은 금강산, 구월산, 묘향산, 지리산과 함께 이 땅의 5대 명악(名岳) 중의 하나로 영산(靈山)이라해 연중 탐방객이 줄을 잇는다. 이 산은 경주와 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로 국립공원 지정을 받았는데 그 과정에서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졌다. 그 안이 국회에서 부결되자 이를 추진해온 중도일보는 부결시킨 당시 야당 대권후보 DJ를 향해 연일 포문을 열었다. 이에 자극을 받은 DJ가 부랴부랴 대전에 내려와 부결시킨 경위를 설명, 오해를 풀었다. (본란 2005년 12월 15일자 참조)
계룡산은 공주시 계룡면과 반포면, 그리고 논산시, 대전시와 이웃하고 있다. 총면적은 60.98㎢. 차령산맥의 중심으로 능선이 닭 벼슬을 쓴 용 모양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천황봉’, ‘연천봉’, ‘쌀개봉’, ‘문필봉’, ‘만적봉’, ‘수정봉’ 등 20여개 봉우리를 형성, 동으로는 ‘동학사’, 서남쪽의 ‘신원사’, 서북에는 ‘갑사’, 동남쪽엔 ‘용화사’가 있다.
닭 벼슬을 인 용의 형국
이태조 이성계는 위화도(威化島) 철군으로 고려조를 뒤엎고 나서 계룡산 천도를 결심, 무학대사와 공주에 내려와 신도안에 도읍을 정하려 했다. 천도 결심은 이런데 있었다. 당시 왕도 개성(開城)에는 고려충신과 반정세력이 득실거리고 많은 정적을 살육한 탓에 이태조는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분위기 전환을 위해 천도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무학대사도 처음엔 공주가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금계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형상)이라며 이곳을 권했다.
그러나 채 1년을 넘기지 못하고 그 작업은 중단되었다. 하륜(河崙) 등이 극구 반대를 해서 한양으로 천도, 오늘에 이른다. 반대 명분으로는 요즘말로 실용주의가 서슬을 세운 때문이었다. 첫째 공주는 너무 남쪽에 치우쳐 동쪽과 북쪽이 너무 멀고 둘째, 주변에 큰 강이 없어 물류집산에 문제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세금을 현물로 징수하던 그 시대에 큰 배가 드나들 강이 없다. 금강이 있다고는 하나 작은 강인데다 강안(江岸)이 퇴적되어 운행이 어렵고 셋째, 당나라 풍수대가 호순신(胡舜臣)이 말하는 유수(流水)에 의해 땅기운이 씻겨내려 쇠할 지형이라 내세웠다.
그래서 한양에 천도를 했다. 하지만 세종 등 몇 임금을 제외하고는 500년간 민란, 폭정, 외세의 침공 등으로 편할 날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