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겐 오래 된 겨울 내의가 두 개 있다. 한 개는 회색이고, 다른 한 개는 베이지 색이다. 물론 내의는 아랫도리만 있고 윗 옷은 없다. 한 벌이라 할 수 없어 그냥 두 개라 얘기한 것이다. 올 해도 추위가 오자마자 옷장에서 내의를 꺼냈다. 아직 다른 사람들은 내의를 입을 시기가 아니지만 난 미리 꺼내서 입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것은 아니지만 괜한 추위에 떨면서 다닐 필요가 없기에 일찌감치 꺼내 입은 것이다. 지금 입고 있는 내의는 언제 샀는지 모른다. 내가 직접 산 것이 아니라 한 10년쯤 전에 선물 받은 것인데 그동안 따뜻한 남쪽 바닷가에 살았던지라 한 동안 입지 않다가 서울에 오면서 5년 전부터 입기 시작했다. 남쪽지방에 살다가 1월 초 서울에 오니 서울이 엄청 춥다는 느낌이 들었다. 서울에 이사와서 집사람이 옷장을 정리 하다가 아직까지 박스도 뜯지 않은 내의를 두 벌이나 꺼내놓았다. 집사람은 짐이 된다며 입지 않으려면 누굴 주던지 옷 수거함에 넣겠다고 했다. 마침 날씨도 추웠던지라 포장지를 뜯어서 입어 보았다. 좀 끼는 듯 했지만 참 따뜻했다. 그날부터 내의 두 벌을 번갈아 가며 입기 시작했다. 내의를 입은지 얼마 안 된 어느날 퇴근 길에 직장 내 목욕탕에 갔다가 옷을 벗는데 내의를 입은 사람이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나 혼자만 내의를 입은 것 같아 참 쑥스러워 하는데 함께 간 동료가 젊은 사람이 벌써 내의를 입었냐고 이상한 듯 물었다. " 야~, 이 사람아 내의가 얼마나 따뜻한데..." 말은 이렇게 했지만 창피한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옷을 입으며 내의 입는 것이 좀 쑥 스럽긴 했지만 나만 따듯하면 됐지 싶어 그대로 입었다. 이것이 버릇이 되었는지 이젠 겨울이 되면 내의를 찾게 된다. 그런데 윗 내의는 와이셔츠 속에 입으려니 덥고 불편해서 벗어 버렸다. 그래서 지금은 아래 내의만 입고 다닌다. 올 해도 추위가 와서 내의를 입으려고 꺼내보니 회색 내의의 가랑이 부분이 낡아서 바느질 옆 부분이 닳아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어차피 속에 입는 거라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싶어 그냥 입었다. 저녁에 잘 때는 몸이 불편해서 벗고 잤는데 아침에 아내가 구멍 난 내의를 보았다. 칠칠맞게 구멍난 옷을 입고 다닌다며 누가 보면 창피하니 당장 버리라고 화를 냈다. 그냥 버리려니 아까워 다시 빨아야 되겠다 싶어 세탁기에 넣어 두고는 다른 베이지색 내의를 꺼내 입었다. 며칠 후 저녁에 거실에서 요가를 한다고 다리를 벌리는데 부직 소리가 났다. 왜 이런소리가 나지 하고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는데 다음 날 아침에 내의를 입으려고 보니 이 내의도 가랑이 바느질 옆 낡은 부분이 커다랗에 구멍이 났다. 지난 저녁에 요가하며 다리 벌릴 때 약한 낡은 부분이 찢어진 것 같았다. 내의를 다시 살 때까지 그냥 입기로 하고 입고 다녔다. 며칠 전 맑고향기롭게 서울지역 모임에 갔다가 오는 길에 지하철 역에서 내의 아랫도리를 5천원 짜리와 1만원 짜리를 걸어 두고 팔고 있었다. 하나 살까 싶어 고르는데 옷걸이에 걸린 내의가 모두 쫄내의라 옷이 몸에 달라 붙으면 다리에 난 털이 따가울 것 같아 그냥 왔다. 지난 토요일 막내 처남 결혼식에 갈 때 찢어진 내의를 입고 갈 수가 없어 어떡하나 고민 하는데 아내가 아들녀석 내의를 꺼내주며 한 번 입고는 안 입는다며 입으라고 한다. 입어보니 다리에 쫙~ 달라붙는 게 엄청 불편했다. 그렇지만 어떡하랴 싶어 그냥 입고 갔다. 둘째 처남 집에 가서 저녁에 잠을 자는데 처남이 내가 입고 있는 내의를 보더니 자기한테 내의가 하나 있는데 딱 한 번 입어 보고만 벗었다는 내의를 하나 주며 입을 수 있으면 입으란다. 어이쿠 이게 왠 떡인가 하고는 얼른 받아 입어 보니 크기도 잘 맞고 편안했다. 26일 맑고향기롭게에서 태안으로 기름제거 하러 자원활동을 간단다. 아내에게 나도 휴가를 내서 갔다 와야겠다고 했더니 갔다오라고 한다. 오늘 직장에 휴가를 하루내어 허락을 받았다. 버리려다 빨아 놓은 내의를 가져 가야겠다. 낡은 내의가 여기에 쓰일 줄 몰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