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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 06-09-07

    미얀마 케라스 스님의 '생일 선물'

본문

지난 정초에 미얀마를 포항교사불자회 법우들 16명이 순례 했습니다. 순례 중 케라스 스님으로부터 법보시 받아온 스님의 영문 설법집, <<명상이 어떻게 도울 수 있나>>에서 제9장을 우리말로 옮겨봅니다. 이 책은 주로 구미(이탈리아, 미국 등)에서 온 서양인들에게 미얀마 불교의 지혜와 수행법을 안내하기 위해 스님께서 10장으로 나누어 우리들의 일상생활에서 실마리를 들며 불교에 접근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있습니다. 저는 옮기면서, 인간 마음을 놀랍도록 정밀하게 관찰하고 거기에서 지혜와 자비심을 개발하는 미얀마 불교의 힘을 절감합니다. <생일 선물> 2004년 2월 12일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날인 생일을 축하하기를 바란다. 그것은 나쁘지 않으나 우리는 거의 우리가 어떤 지를 의식하지 못한다. 정확히 생일날에 우리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변화들을 실감할 때만이 생일은 바람직할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바깥의 것들로 분주하게 살아왔기에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르고 산다.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볼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않듯이 평생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거의 만나지 못한다. 이것은 매우 위험스런 삶의 방식이다. 나는 서른다섯 살 생일 때부터 ‘나는 어떤가’를 깊이 자각하여 왔다. 내 생일은 하루하루 천천히 나를 나이 먹게 한다. 그 이후로 나는 나 자신과 이웃과 더불어 후회스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더 현명하게 되었다. 주변의 그 누구도 욕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사랑과 연민을 나누고 인내하고 조화롭게 살아왔다. 사랑과 연민의 감정을 깊이 체득하고 있지만, 때로는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바르지 못할 때 화가 나기도 한다. 그러한 화는 학생들에게 매우 좋고 유익하게 작용한다. 만일 학생들이 나의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주의하지 않는다면 그들과 아무런 일도 못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자비스럽게 용서해야 한다. 내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학생은 그의 성격과 공부의 진전이 점점 나빠진다. 공부와 지식을 제한하도록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개발하기 위해 공부하는 우리 시대에 좋은 안내가 실로 필요하다. 나는 공부할 때 자질 있는 선생님에게 지도받았다. 내가 수업에서 정말 잘못할 때 나는 가끔 선생님에게 적절한 욕도 먹고 꾸지람도 들었다. 이것은 나에게 아주 좋았고 나를 크게 변화 시켰다. 나는 그때 그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건 끝났다. 2005년 2월 12일에 난 서른아홉 살이 되니 말이다. 올해 들어 나는 흰 머리카락이 몇 올씩 나고 눈은 도수가 더 높은 안경이 필요하다. 머리는 두 세 시간 책 읽는데 몰두하고 나면 어질어질하다. 내가 서른아홉 살 생일에 느낀 것들이다. 이런 것들 모두가 나이가 드는 것과 상관있고 생일이 가져다 준 것이다. 불교의 전통적인 사상에서 보자면, 한 올의 흰 머리카락을 보았을 때일지라도 그대는 좋은 명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죽음을 알리는 깃발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한 올의 백발을 보았을 때조차도 깊은 명상을 닦는 수행자의 길을 걷기 위해 일상적인 삶을 버렸다고 부처님 전기는 전한다. 부처님의 이 이야기가 불자들이 늙어가면서 좋은 명상을 닦는 계기를 촉발시키기를 바란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수행은 조용히 그리고 용감하게 닥쳐오는 우리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불교 사상에서 보자면, 죽음은 태어남에서, 태어남은 죽음에서 온다. 사람 마음의 애착은 죽으면서 또 다른 탄생을 거머쥔다. 생사의 수레바퀴는 집착의 에너지로 쳇바퀴 돈다. 그러나 강력한 명상의 지혜를 통하여 집착의 에너지가 제거된 사람은 지금 여기 그리고 죽음 뒤에도 궁극적인 평화, 니르바나를 얻는다. 우리는 부처님 가르침 중에 캄마 니야나(kamma niyana, the Law of action & reaction 행위와 반응의 법칙, 인과법因果法)와 담마 니야나(Dhamma niyana, the Law of rise & fall, 생기고 사라지는 법칙, 연기법緣起法)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일상 삶에 긴요히 필요한 참된 지혜를 이 두 법칙에서 배워야 한다. 인과법에서 보자면, 행동, 말, 생각에 좋고 나쁜 것이 있다. 인간의 마음에 나쁜 행위를 유발시키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세 가지 뿌리가 있는가 하면, 좋은 행위를 낳는 탐욕 않음, 성내지 않음, 어리석지 않음이라는 다른 세 가지도 있다. 우리는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나쁜 결과들을 통하여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나쁜 행위들을 아주 분명히 언제나 지어낸다는 것을 쉽사리 알 수 있다. 또 좋은 결과를 가지고 우리를 만족스럽게 하는 좋은 행위들은 탐욕 않음, 성내지 않음, 어리석지 않음이 항상 지어낸다는 것을 쉬이 알 수가 있다. 지금 우리가 누구인가는 과거의 우리 행위가 지어내고, 앞으로 우리가 누구일지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사는 가가 지어낸다고 부처님은 가르치셨다. 우리 위에 아무도 군림하지 않는다. 우리, 인간은 아무도 운전하지 않고 작동하는 일종의 기계 장치와 같은 존재다. 그러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은 우리를 나쁜 길로 몰아가고, 아량, 사랑, 지혜는 우리를 좋은 길로 들게 한다. 물론, 예컨대 돈, 권력, 유명세, 인기, 명예 같은 것을 추구하는 탐욕에 조종당할 때, 우리는 정당한 수단이나, 단지 우리를 눈멀게 하고 바보로 만들게 하는 우리 마음에 뿌리박고 있는 탐욕에 의한 부정적인 수단으로 일을 한다는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생명체들의 성냄이 매우 실제적인 방법에서도 얼마나 나쁜가 하는 것을 말하겠다. 2005년 2월 4일, 오늘 내가 방에서 3시간 동안 오후 명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2마리 참새가 맹렬히 화가 나서 서너 시간을 싸우고 있다. 정말이지 난 이제 이 녀석들에게 웃음 짓고 있다. 녀석들은 때때로 내 양쪽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아시다시피 난 내 자신의 내면을 깊이 응시하는 눈으로 명상하고 있다. 믿기지 않게도, 이 녀석들은 고통 밖에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데도 서로 싸운다. 연민을 느낀 난 싸우는 두 녀석들을 위해 자비 명상(Metta bhavana)으로 전환하였다. 나는 녀석들이 곧 싸움을 멈추기를 염원한다. 만일 녀석들이 내 말을 알아듣는다면, 당장 싸움을 멈추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짐짓 나를 속일 수 없었다. 잠시 명상을 멈추고 일어나 싸우는 참새들을 사진 찍고는 다시 명상에 들었다. 여기 이 실제적인 상황에서 두 마리 참새는 단순히 성냄 때문에 싸우고 있다. 자신들의 더 많은 어떤 몫을 원한 것 때문에 서로 간에 일어난 녀석들의 성냄이 왜 일어난 것인지를 가만히 생각해보라. 그것은 탐욕, 지나친 욕심 때문이다. 그래서 탐욕은 탐욕스런 행위를 짓고, 그것에서 성냄이 비롯되고, 성냄은 고통 밖에 아무것도 없는 서로간의 싸움을 지어내는 분노의 행위를 짓는다. 분노의 행위는 결코 좋은 행위를 불러오지 않을 것이고, 그것은 결단코 어떤 좋은 결과도 초래하지 않음을 알라. 이것이 부처님이 우리에게 언제나 그릇된 행위들을 초래하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뿌리를 쳐부수라고 가르친 까닭이다. 부처님은 비난하거나 누구를 단죄하거나 어떠한 종교에 관심이 없었다. 또한 바보스럽게 이 종교에서 저 종교로 개종하는 것에도 무관심하였다. 그러나, 인간 마음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그릇된 뿌리를 부수는 길을 현명하고, 사랑스럽고, 자비롭게 가르쳐 주셨다. 우리 마음속의 이 삼독심(三毒心)을 제거할 수 없는 한, 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모든 행위들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냄이라는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아야 하고,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평화스러움을 위해 먼저 성냄의 정도를 어떻게 줄여야만 하는 지, 그 방법을 찾아야한다. 그러면, 지혜, 곧 이해의 의문이 여기서 일어난다. 인과법(캄마의 법칙)과 연기법(담마의 법칙) 두 종류의 이해가 있다. 행동과 말과 생각이 잘못되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인과법 이해라는 종류는 행동과 말과 생각에서 우리를 좋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인 생각으로 나쁜 짓을 피하기 때문에 그것은 두뇌의 수준일 뿐이다. 우리, 인간은 나쁜 짓은 나쁜 결과를, 좋은 짓은 좋은 결과를 우리에게 가져올 것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와 같은 이해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을 위해 나쁜 짓들을 피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오늘 오후 싸우는 참새들은 결코 그 원인과 결과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이해하도록 교육받는다고 할지라도, 이해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인간은 동물이 아니다. 우리는 문명된 사회에 살아가기 위한 일들을 교육받을 수 있고 배울 수 있다. 인간 목숨 보다 결코 더 소중하지 못한 바보스런 것들 때문에 서로 싸울 필요가 없다. 위없이 대자대비하신 스승, 부처님은 피 흘리고, 바보스런 것들을 두고 싸우고, 해코지하고, 괴롭히고 하는 일에 결코 동의하지 않았고, 동의하지 않으실 것이다. 평화스런 스승이고, 평화롭고 문명된 사회를 사랑하고, 개인과 공동체 세상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는 길을 가르치는 까닭에 부처님은 인간에 해로운 일은 무엇이든 동의하지 않으신다. 이런 까닭에, 부처님은 수행할 때 인간 마음 깊숙이 들어가는 다른 종류의 이해를 가르친다. 그것은 몸과 스스로의 안과 스스로가 없는 정신 현상의 생멸에 대한 이해이다. 몸과 정신의 생멸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부처님은 우리에게 위빠사나 수행으로 알려진 길을 주셨다. 우리는 그것을 정신 건강을 치유하는 불가(佛家)의 위빠사나 명상이라고 자주 부른다. 또 그것은 광범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조금만 설명하겠다. 실제 우리는 날마다 집에서 30분 동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을 알아채는 것이나 복부가 일어나고 꺼지는 것을 알아채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 세세하게 그 기법을 그대에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그것은 “정신적인 현상”이라 부르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정확히 배우는 것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에 화가 났을 때, 그대가 화가 난 그 사람이나 그것이 아니라, 화 자체에서 배워야 한다. 이해하기 위해 사람이나 일에서는 배울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잘 이해하기 위해 그대의 성냄에서는 배울 수 있으며, 또 그 성냄이 주의 깊게 관찰될 때 그것을 사라지게 할 수도 있다. 그러고 나면 그대는 더 좋아질 것이다. 분노를 관찰하고 있는 순간, 그 관찰이 그대를 보호하고, 바깥의 사물이 그대를 어지럽힐 수 없고, 또한 내면의 화가 그대를 상처 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외부의 어떠한 것에도 정신적으로 상처받지 않고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방법이며, 배울 필요가 있는 길이다. 그리고 왜 우리가 화가 났는가 하는 것에서 배워라. 그것은 우리는 무엇인가에 탐욕스럽고, 그 탐욕을 충족시킬 수 없으며, 원하는 대로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탐욕스런 마음은 우리를 성난 마음과 성난 행동을 하게 한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 내면에 일어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또한 어리석음이 일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탐욕이 일어나고, 탐욕스런 마음은 성냄으로 변하고, 성내는 마음은 우리를 어리석음으로 떨어지게 하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악순환한다. 물론, 이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심지어 하루도 아무것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화가 난 그 순간에 화 그 놈을 온 마음으로 그리고 깊이 관찰하는 연습을 할 때 그대는 분명하고도 자신 있게 이해할 수가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방법을 수행할 수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분노를 놓지 못할 것이며, 심지어 어떤 사람과도 다르지 않을 것이며, 우리는 누구보다도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다. 나는 말한다. ‘우리는 널리 서로 용서하며 참으며, 같은 지구별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와 사랑과 연민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 우리 모두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에 이 길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서 말미암은 어떠한 짓도 결코 좋게 되지 않는다. 그런 짓은 우리에게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 관용과 자비와 지혜로움에서 말미암은 짓은 길이 좋을 것이다. 그런 짓은 우리에게 좋은 과보를 불러온다. 나쁜 생일은 나쁜 짓(캄마)을 통하여 생긴 나쁜 과보에 포함되며, 좋은 생일은 좋은 짓(캄마)을 통하여 생긴 좋은 업보에 또한 들어 있다. 우리가 현재 바른 일들을 할 수가 있을 때, 참된 평화가 우리 내면에 싹 튼다. 그것은 바른 이해(正見, 역주: 8정도의 첫번째로 보통 바른 견해로 옮긴다. 연기緣起 진리의 통찰이다. )을 통하여 인식할 수가 있고, 얻을 수 있으며, 볼 수가 있다. 바른 이해는 그대 안에 나타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있는 그대로 두고 관찰하므로써 개발할 수 있다. Right Understanding can be developed by observing greed, anger and delusion as they truly when each is present in you. 그대가 ‘그건 쉽지 않은 걸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그대가 바른 것을 해야 할 때는 쉬운 것은 없는 법이다. 참된 평화를 얻으려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뿌리 뽑을 수 있는 바른 길 수행으로 바른 이해를 개발하여야 한다. 내가 이 글 여기에서 설명한 것은 단지 기본적인 수준일 뿐이다. 내 둘레 사람들과 같이 내 일상 활동들을 한 몇 해 동안 나는 이 길을 수행해야 하였고, 앞으로 여전히 수행할 것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이 길을 수행한 나의 경험에서 나는 그대에게 들려 줄 아주 많은 것들이 있다. 여기 이 작은 글에서는 다 쓸 수 있는 여유가 없다. 그래서다. 나의 서른아홉 살 생일 선물을 그대들 모두에게 준다. 그것을 맛보기를 원한다면 나와 함께 수행하는 것을 환영하고 초청한다. 세상의 뭇 생명들 길이 행복하고, 세계 도처에서 어떤 이유로 싸우는 모든 전쟁들 곧 그치고 평화롭기를 기원한다. 서로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관용은 연습해야 한다. 관용은 우리를 이해하게 한다.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 때, 사랑과 연민은 이해를 통해 태어난다. 그러면, 자신과 다른 이들과 관계가 아주 좋아질 것이다. 그러면, 개인과 공동체가 평화로우리라. (제9장 전문 완역) <뒷표지의 글> 머리는 생각들을 피워낸다; 가슴은 감정들을 피워낸다. 생각들은 사람을 어지럽게 한다; 감정들은 사람들을 괴롭게 한다. 그것들을 버리는 데 능숙할 때, 생각들과 감정들은 그대를 행복하고도 평화롭게 하리라. 지적인 사람들은 너무나 도도하다; 현명한 사람들은 겸허하다. 도도함은 사람을 두렵게 한다; 겸허함은 사람을 정답게 한다. 두려움은 미움을 낳는다; 정다움은 사랑을 낳는다. 그래서 현명한 이가 되어라. 뭇 생명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기를 바라나이다! The brain exudes ideas; that heart exudes emotions. Ideas make people wonder; emotions make people suffer. When one is skillful in letting go, Both ideas and emotions will make you happy and peaceful. The knowledge are so proud; the wise are so humble. Pride makes people fear; humbleness makes people friendly. Fear makes hate; friendliness makes love. So be the wise. May all the beings be happy, healthy and peaceful. -Kelasa Bhikkhu, How meditation can help, Mahagandayon monastry in Mandalay Myanmar, 2005. 일천명의 수행자들이 오늘도 탁발하며 치열한 수행을 하고 있는 미얀마 만달레이 마하간다용 승원에서 뵙고 문답을 나눈 이 승원의 팔리어 문법 강사 케라스 스님은 우리들에게 저자 서명을 하여 이 책을 선물하고, 스님의 방문 앞에서 함께 기념 사진도 촬영하여 주셨다. 문간에서 몇 번이나 합장하며 작별 인사를 하는 나에게 자애로운 미소로 답해 주시던 스님의 모습이 못내 잊히지 않는다. 미얀마 불교는 타이나 스리랑카 불교에 비하여 팔리어 삼장에 대한 문법적인 분석을 중시한다. 그렇다면, 스님의 교학은 정확하고, 법력은 높은 것이다. 남방 불교는 4성제와 8정도의 이해와 수행이 그 핵심을 이룬다고 한다. 수행은 정념에 있어 보인다. 문답끝에 스님께 꼭 읽어야 할 경전 한 권을 여쭈니, 주저없이 <<대념처경大念處經>>을 권했다. 이 책은 164쪽의 문고판 포켓북인데, 상좌부 불교의 수행법과 삶의 훌륭한 길라잡이가 될 지혜가 담긴 책임이 분명하다. 케라스(카일라스, 수미산) 스님의 허락 하에, 우리말로 옮겨서 우리나라 불자들에게도 스님의 지혜 등불과 수행 지침이 전해졌으면 좋겠다. 우리 교사불자회에서도 이 책을 책장에 보관하기만 하지 말고 같이 차근차근 읽어나가면 좋겠다. 그것이 스님의 뜻이고 우리가 머나먼 구도의 길에 나섰던 까닭이지 않는가! 나에게 능력과 시간이 주어지면 한 번 우리말로 옮겨보고 싶다. 나에게 요즈음은 '인연'이란 말을 끊임없이 떠오르게 하는 나날이다. 남방 만달레이에도 가을이 왔는지, 스님은 안녕하신지 궁금하다. 스님께서 몸 건강하시고 미얀마 땅이 길이 평안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