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입력 | 2010-04-30
▲ 이삼우(기청산식물원장)
내 자식이다 내 재산이다 하면서/ 어리석은 사람은 괴로워한다./제 몸도 자기 것이 아닌데 / 어찌 자식과 재산이 제 것일까.
법구경(法句經)에 있는 말씀이다.
25여 년 전 필자가 홀연 밀어닥치는 고해(苦海)에 빠져서 너울지는 거센 파도타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삼재(三災)가 물러가고 좋은 때가 바뀌어 오기를 기다리며 글쓰기로 시름을 달래다 그럭저럭 모인 글들로 엮은 첫 산문집 '나는 새요 나무요 구름이요'를 송광사 불일암으로 법정스님께 보내드렸다. 스님의 문체는 읽기 쉽게 편안하게 엮어나가는데 매력이 있었다. 그러한 문체며 그 홀가분한 신선주의 철학적 삶을 흠모했었다. 그래서 먼저 첫 산문집을 보내드렸던 것이다.
열흘 후 스님으로부터 답서와 '진리의 말씀'이라는, 스님이 읽기 쉽게 풀이한 법구경 책이 부쳐왔었다. 머리맡에 두고 종종 읽어보면서 세속에 물든 속심을 벗고 싶은 충동을 받곤 했었다. 그래서 탐욕 줄이기에 애쓰기도 하면서 내 나름의 인생행로 수정에 큰 영향을 받기도 했던 것 같다.
사람이 청빈하게 살기는 마음먹기에 따라서 가능하지만 무소유의 개념을 실천하기란 여간해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 세속에서는 무소유란 곧 알거지를 뜻한다. 스님의 본래 바라는 무소유의 뜻이란 그런 것은 아닐 거다. 없어도 될 걸 없애는 것이 무소유의 본질일 것이다.
이 세상에 스님같이 살 수 있는 인간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지식과 지혜가 달관의 경지를 넘어서서 자부심과 긍지가 넘쳐나야 함은 물론 하염없이 부지런해야 되고 식성도 까다롭지 않아야 되고 자연을 보면서 즐기는 안목이 있어야 하고 그리고 가슴속에는 무한한 자비심이 넘쳐흘러야 한다.
노자는 치인사천 막약색(治人事天 莫若嗇)이라 했다. 사람 다스리고 하늘 섬기는 데는 검박한 농부 같아야 한다는 뜻이라 풀이하고 있다.
'농부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생활해야 할 뿐만 아니라 검박한 생활을 해야 한다. 검박함이란 인색함과 사치함의 중간쯤이다. 검박함을 생활의 원리로 삼으면 빨리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번역자가 설명을 덧붙여놓았다. 농부처럼 살아갈 줄 알면서 안빈낙도(安貧樂道)의 길을 걸어 갈 수 있으면 만족할 만하다 했다.
공자도 사즉불손 검즉고(奢則不遜 儉則固)라, 사치하면 겸손하지 못하고 검소하면 고루하다. 당신도 고루하지만 검소를 택한다 했다.
법정스님은 다 비우다시피하고 이승을 떠나셨기에 하늘 높은 곳으로 훨훨 날아 오르셨으리라는 확신을 한다. 지옥은 땅 속에 있다고 옛부터 그렇게 표현해오고 있다. 지구 중심에 불덩이 있음을 알고 한 것일 거다. 너무 무거워지면 땅속 뜨거운 곳으로 가라앉는다. 천국은 하늘에 있어서 날아올라야 한다. 영육이 가벼워야 날개 짓을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소유 되라는 것일 거다.
무소유란 받아들이지 않아서 궁색하여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쌓아 머물게 하지 말고 내어보내라는 뜻일 거다. 샘물을 퍼내면 줄곧 퍼낸 만큼 고여 들게 마련이니 겁내지 말고 좋은 데다 거리낌 없이 쓰라는 뜻일 거다. 좋게 쓰면 좋은 사람 되고 나쁘게 쓰면 나쁜 사람 되고, 고이면 썩고 썩으면 솟는 물구멍도 막히게 된다 했다. 비우면 차기 때문에 새들어오는 만큼 써서 건강한 샘을 만드는 것이 곧 건강한 삶이겠다.
흡호(吸呼)이라 하지 않고 호흡(呼吸)이라고 쓴다. 단전호흡을 시작할 때 숨을 뱉어내기부터 먼저 한다. 숨을 들이키기부터 하면 갑갑하다. 먼저 뱉어내면 절로 잘 빨아들어지게 마련이다. 물질은 빈 곳에 몰려든다. 기실 무소유란 있을 수 없다. 비우고 있는 순간에도 다시 채워지는 자연의 순환법칙이 있기 때문이다. 뭔가를 소유하고 있기에 존재하고 존재하기 때문에 뭔가 소유하게 된다. 하기에 스님의 무소유는 안분지족을 뜻함인가 싶다. 잦은 봄비 속에 스님의 49제도 끝났으나 우리들에게 물려주신 유산 무소유의 커다란 숙제는 끝이 나질 않았다.
이삼우(기청산식물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