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초당과 불일암
박석무 (다산학연구소 이사장)
4월 28일, 지리산 지맥 조계산 일대에는 오전 내내 주룩주룩 비가 내리며, 겨울처럼 날씨가 추웠습니다. 법정스님 49제 막재(終齋)가 빗속에서 열리고 있어 송광사 대웅전 뜨락 곁 승보전을 향해 비를 피해 박물관 처마 안쪽에 섰습니다.
스님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대열에 끼어 경건하게 진행되는 의식을 눈여겨보았습니다. 생전에 뵙던 모습과 차이 없는 영정을 바라보고, 합장하여 기도를 올리는 엄숙한 수많은 불자들 모습도 보았습니다. 막재에라도 참여해야 생전에 나누었던 정에 덜 서운할까 여겨져 거기에 서 있었습니다.
다산은 타의에 의해 경기도 출신이 전라도 땅 끝 강진 땅에 유배되어 외롭고 쓸쓸한 다산초당에서 학문의 대업을 이룩하였고, 법정스님은 자의로 불일암이라는 고적한 암자에 칩거하면서 '무소유'의 불도를 깨쳤습니다. 다산은 강진에서 18년, 법정은 불일암에서 17년, 길고 긴 밤과 낮을 보내며 자신들이 이룩하고자 했던 도(道)를 얻었다고 하겠습니다.
180년 전에 다산은 타계했지만, 스님은 49일 전에 열반하여 막재를 마치고 불일암 주변에 산골(散骨)함으로 해서 일단 지상에서 삶과 법신(法身)의 흔적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오호통재로다.
1만여 명에 이르는 추모객들이 모여 스님 환생을 비는 칠칠재는 대단했습니다. 그런 장대비 속에서 꿈쩍도 않으며 합장하고 절하는 불자들의 모습은 고승대덕을 보내는 의식으로는 부족함 없이 넉넉했습니다.
생전의 높은 도와 덕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저런 장엄함을 보여줄 수 있었을까요. 역시 대종사 법정스님은 크고 높은 스님이었습니다. 전국곳곳에서 모인 대중들이라는 것도 대단하지만 그렇게 춥고 비오는 날인데도 그처럼 운집한 사부대중들의 정성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1976년 8월, 무더운 더위 속에 우리(필자·고 김남주 시인·옥우 김정길)일행은 불일암으로 스님을 뵈러 갔습니다. 점심 뒤에 광주에서 출발한 여정이어서 저녁 해질 무렵에야 암자에 도착했으나, 스님은 안계시고 빈 암자만 외롭게 서 있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니 저 밑에서 땀을 뻘뻘 흘리시며 스님이 올라오셨습니다. 가지고 갔던 수박을 쪼개 먹으며 뜨락에 한창 피어나던 그곳이 원산지라던 달맞이꽃 모습을 구경했습니다.
유신독재에 신음하던 우리, 소리 없는 함성처럼 터져 나오던 달맞이꽃을 보면서 마음을 달래는데, 스님은 수박씨를 하나하나 쓸어 담고 계셨습니다. 왜 그러시느냐고 물었더니, 냄새를 맡으면 개미가 달려들고, 그러다보면 우리는 무의식중에 발로 밟아 살생을 하게 되니, 개미가 오기 전에 씨를 주워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스님다운 화법이었습니다.
그날 밤 우리는 밤새워가며 스님의 수필이야기를 하고, 민주회복에 대한 우리의 소원을 이야기 했습니다. 스님도 다산을 좋아했지만 김남주시인도 다산이 좋다며 이야기는 진진하기만 했습니다. 34년이 지나 스님은 떠나고 빈 암자만 남아 있는 그곳을 김정길동지와 함께 찾았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 숲이 우거져 옛정취와는 다르나, 17년간 도를 닦으며 글을 쓰시던 스님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민족시인 김남주도 생각났습니다. 학문연구에 밤낮을 모르고 몰두하던 다산초당 다산선생도 생각되었습니다. 비는 계속 내리는데, 학자와 선승과 김시인이 오버랩되면서 찬비를 맞는 쓸쓸함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스님 명복을 빕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