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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3-10-28

    입 다물고 귀를 기울이라

본문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산마루를 바라보고 있으면,


내 속뜰에서는 맑은 수액이 흐르고 향기로운 꽃이 피어난다.


혼자서 묵묵히 숲을 내다보고 있을 때


내 자신도 한 그루 정정한 나무가 된다.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자연을 대하고 있으면,


그저 넉넉하고 충만할 뿐 결코 무료하지 않다.


이런 시간엔 나는 무엇엔가 그지없이 감사드리고 싶어진다.


하루 스물네 시간 중에서 맑고 잔잔한 이런 여백이 없다면


내 삶은 탄력을 잃고 이내 시들해지고 말 것이다.



올해도 모란은 흐드러지게 피었었다.


겨울 날씨가 춥지 않아서였던지 예년보다 한 열흘 앞당겨 피어났다.


모란밭 곁에서 같은 무렵에 피어난 노란 유채꽃이


모란의 자주색과 아주 잘 어울렸다.


꽃의 빛깔과 모양이 같아서 유채꽃이라 사실은 갓꽃이다.


지난해 겨울 김장을 하고 남겨둔 갓인데


봄이 되니 화사한 꽃을 피운 것이다.



철새로는 찌르레기가 맨 먼저 찾아왔다.


달력을 보니 4월 9일.


쇳소리의 그 목청으로 온 골짝을 울리는 소리에 귀가 번쩍 띄였다.


아주 반가웠다.


모란이 피어나기 시작한 날 밤에 소쩍새도 함께 목청을 열었다.


4월 16일로 적혀 있다.


잇따라 쏙독새(머슴새)도 왔다.


머지않아 꾀꼬리와 뻐꾸기도 찾아올 것이다.


이렇게 철새들이 찾아와 첫인사를 전해올 때,


해마다 겪는 일이지만 내 마음은 설렌다.


새의 노래는 (울음이 아니다) 잠든 우리 혼을 불러일으킨다.


굳어지려는 가슴에 물기를 보태준다.


지난 4월 초, 남쪽 바다 한가운데 외떨어져 있는 섬 백도를 보고


오는 길에 거문도에 들렀다.


거기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으로 세워진 등대가 있는데,


그 등대로 가는 동백나무 숲길에서 밀화부리 소리를 듣고,


나는 그날 종일 행복에 겨웠다.



자연은 이렇듯 우리에게 많은 선물을 상으로 열어 보이고 있는데,


일상에 찌든 사람들은 그런 선물을 받아들일 줄을 모른다.


받아들이기는 그만두고 얼마나 많이 허물며 더럽히고 있는가.


받아들이려면 먼저 입을 다물어야 한다.


그리고 귀를 기울이며 지켜보아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에 찌든 버릇 때문에


모처럼 자연의 품안에 안겨 있으면서 입 다물고 귀 기울이며 지켜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수첩을 펼쳐보니 지난 4월 9일 오후로 적혀 있다.


할 일이 있어 외부로부터 방해받고 싶지 않은 날은


신발을 부엌에 들여놓고 덧문을 닫아버리는 수가 더러 있다.


그날도 읽던 책을 마저 읽으려던 참인데 인기척이 났다.


들려오는 소리로 보아 젊은 남녀 한 쌍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두 시간 가까이 여자 혼자서 뭐라고 연방 지껄여댔다.


잠시도 쉬지 않고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끊임없이 쏟아내었다.


방음이 되지 않은 한옥이라 방안에서 하던 일에 집중이 될 턱이 없었다.


나는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면서 그 지껄임이 그치기만을 기다렸다.


되지도 않는 지껄임을 아무 대꾸도 없이 듣고 있는 사내녀석의 인내력에 나는 놀랐다.


아마 그 녀석은 사랑에 빠진 모양이었다.


사랑에 빠지면 눈도 멀고 귀도 멀어 쓰잘데기 없는 지껄임도 음악으로 오해할 수 있으니까.


문 열고 나가서 썩 내려가라고 고함이라도 쳐주고 싶은 생각이 울컥울컥 치밀어 올랐지만,


사랑에 빠져 골이 빈 연인들이 무안해 할까봐 나 또한 인내력을 기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쏟아놓는 말을 누군가가 가까이서 듣고 있는 줄을 안다면


그렇게 되나캐나 마구 쏟아놓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명심하라.


누군가는 반드시 듣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무심코 하는 말이건 뜻을 담은 말이건 간에 듣는 귀가 바로 곁에 있다.


그것을 신이라고 이름붙일 수도 있고, 영혼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불성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은 곧 그 사람의 속뜰을 열어 보임이다.


그의 말을 통해 겹겹으로 닫긴 그의 내면세계를 훤히 알 수가 있다.


모처럼 꽃이 피어나고 새잎이 돋아나는 싱그러운 신록의 숲에 와서,


아무 생각 없이 빈 마음으로 입 다물고 귀를 기울이면서 가만히 있기만 해도 충만할 텐데


사람들은 그럴 줄을 모른다.


일상에 때묻고 닳아진 자신을 그 어느 때 무엇으로 회복할 수 있겠는가.


입 다물고 귀를 기울이는 습관을 익히라.


말이 많고 생각이 많으면 진리로부터 점점 멀어진다.


말과 생각이 끊어진 데서 새로운 삶이 열린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카톨릭의 관상수도자였던 토마스 머톤 신부는 그의 <관상기도>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침묵으로 성인들이 성장했고 ,


침묵으로 인해 하느님의 능력이 그들 안에 머물렀고


침묵 안에서 하느님의 신비가 그들에게 알려졌다.“


그러기 때문에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다’는 논리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찾고 있지만


침묵 속에 머무는 이만이 그것을 찾아낼 수 있다.


발이 많은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가 경탄할만한 것을 말한다 할지라도


그의 내부는 비어있다.


무엇보다도 침묵을 사랑하라. 침묵은 입으로 표현할 수 없는 열매를 그대들에게 가져올 것이다.“



불교의 초기경전인 <숫타니파타>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입안에 도끼를 가지고 나온다.


어리석은 사람은 말을 함부로 함으로써 그 도끼로 자기 자신을 찍고 만다.“



우리는 말을 안해서 후회하는 일보다는


말을 해버렸기 때문에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한번은 기차를 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면서 내 인내력을 시험한 적이 있다.


담배 연기를 몹시 싫어하는 나는 기차여행 때는 으레 금연칸을 탄다.


금연칸에는 담배를 피지 않는 사람과 부녀자들이 주로 타게 마련이다.


그날도 나는 금연칸을 선택했다.


내 자리에 한줄 건넌 앞자리 어린애 하나를 거느린 30대 초반의 아주머니와


그의 친구인 듯한 그 또래의 여인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열차가 한강교를 지나자마자 아이를 거느린 아주머니가


친구를 상대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친구는 어쩌다 한마디씩 대꾸를 할 뿐 한쪽에서만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 해서 지껄여댔다.


아이도 지겨운지 말많은 엄마 곁을 떠나 복도로 뛰어다녔다.


새마을 열차로 서울에서 부산까지 4시간 10분이 걸리는데,


부산역에 도착하기 직전까지 그 여인은 잠시도 쉬지 멈추지 않고


무슨 할말이 그리 많은지 계속 쏟아놓았다.


그런 여인을 아내로 맞아 한평생을 살아갈 남자는 귀머거리가 아니면


존경할 만한 인내력의 소유자일 것이다.


그날의 새마을호는 연료의 힘으로 달린 것이 아니라,


그 여인이 계속 쏟아놓은 ‘입심’으로 달린 것이 아니었을까.


귀가 멍멍해진 채 부산역에 내린 그때의 내 느낌이었다.


그 뒤로부터 나는 절대로 금연칸을 타지 않는다.



자신의 영혼을 맑히기 위해 매주 월요일을 침묵의 날로 지켰던 마하트마 간디는


이와 같이 타이르고 있다.


“먼저 생각하라. 그런 다음에 말하라.


‘이제 그만’ 이라는 소리를 듣기 전에 그쳐라.


사람이 짐승보다 높은 것은 말하는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능력을 부당하게 행사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짐승만도 못하다.“



이글을 끝맺으려는 바로 지금 첫 꾀꼬리 노래가 들려오고 있다.


5월, 6일.


해마다 같은 시기에 찾아오는 이 놀라운 질서.


자연의 소리는 사람의 소리에 견줄 때 얼마나 맑고 신선한가.


우리는 그 자연의 소리를 배워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입 다물고 귀를 기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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