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마음 6월호>에 게재한 법정스님의 글입니다.
혼자서 먹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때로는 머리 무거운 일인데 여럿이 모여 사는 대가족의 경우는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큰일이다.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가려진 곳에서 하는 일을 ‘그림자 노동’이라고도 한다.
주부들이 집안일을 하는 것도 이에 해당한다.
그림자 노동에는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다.
굳이 일의 공덕을 따지자면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고 하는 이 그림자 노동에 그 공덕이 있을 것이다.
스님들이 많이 모여 사는 큰절에는 각기 소임이 있는데,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드는 공양주와 채공에게 장을 보아다가 물자를 대주고
후원 일을 총괄하는 소임을 전좌(典座) 또는 별좌(別座)라고 한다.
전좌는 어떻게 하면 정진 대중이 맛있게 공양하여 몸과 마음이 함께 안락하게 될 수 있을까에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이와 같은 결의와 행위로 수행을 삼는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수행도량에서 전좌 소임은 신참이 아니라
법랍이 많은 구참이 맡는다. 그만큼 중요한 ‘식사대사’이기 때문이다.
13세기 일본의 한 젊은 스님이 중국으로 법을 배우러 간다.
우연히 한 노승을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좌교훈(典座敎訓)’으로 전한다.
예순 한 살이나 되는 노스님은 어떤 절의 전좌 소임을 보는 분인데,
다음 날 대중공양을 하기 위해 30리가 넘는 항구도시에 정박해 있는 외국 상선으로 표고버섯을 사러 온 것이다.
그 때 젊은 스님이 차를 대접하며 주고받은 이야기 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이 드신 노스님께서 어째서 참선을 하거나 경전이나 조사어록을 배우지 않고 번거롭고 힘든 전좌 소임 같은 걸 보십니까?’
젊은 스님의 진지한 물음에 노스님은 크게 웃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외국의 젊은이, 그대는 아직도 진정한 수행이 뭐라는 걸 모르고 있군. 문자라는 것도 모르는 것 같소.’
노스님의 이 말에 그는 문득 부끄러운 생각이 들면서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는다.
‘노스님, 문자란 어떤 것입니까? 그리고 수행이란 어떤 것입니까?’
‘잘 물었소. 그대가 지금의 그 물음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문자를 알고 수행을 알 때가 올 것이오.’
노스님은 자리를 뜨면서 이렇게 말한다.
‘언제든지 좋으니 내가 사는 절에 한 번 오시오. 그 때 차분히 이야기 합시다.’
여름철 안거가 끝나자 노스님은 전좌 소임을 내놓고 본사로 돌아가는 길에 소문을 듣고 일부러 젊은 스님이 사는 절에 들른다.
다시 만나게 된 반가움에 젊은 스님은 지난 날의 일을 생각하고 마주 앉는다.
노스님이 입을 연다.
‘문자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문자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수행자는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지요.’
‘노스님, 문자란 무엇입니까?’
‘1 2 3 4 5라오.’
‘그럼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은 본래 모습 그대로 수행하고 있소.’
하루 24시간의 기거동작이 바로 수행이다.
어떤 한정된 시간과 공간에 매임이 없이 깨어 있는 삶이 곧 수행이라는 가르침이다.
젊은 스님은 그 후 깨달음을 이룬 뒤 고국에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며 이와 같이 말한다.
‘내가 문자가 무엇인지를 얼마 쯤 알고, 수행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오로지 그 전좌 노스님의 크신 은혜다.’
젊은 스님의 이름은 도원(道元)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