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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5-04-25

    4월 17일 봄 대중법회 법문 정리

본문

<마음가짐>




그동안 잘들 지내셨습니까. 꽃철에 만나 뵙게 되어 더욱 반갑습니다.


제가 요즘 천식흡입제를 사용해서 기침은 나지 않은데 그 대신 목이 자꾸 잠기네요.


잠기는 목소리를 전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천지간에 꽃이에요.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이 꽃입니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피니까 봄이에요.


만약 꽃이 없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럼 봄이 아니지요. 꽃이 있으니깐 봄 같지 꽃이 피지 않는다면 봄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세상일도 마찬가지일겁니다. 어떤 개인이건 집안이건 인생의 꽃을 피우면서 사는 집은 복 받은 집이요, 계절이 와도 꽃을 피우지 못하는 집안이 있다면 그 집은 어두운 집안일거에요.




멀지 않아 가정의 달이고 그래서 이야기의 주제를 가정으로 삼았습니다.


제가 얼마 전 들은 이야기입니다.


올해 70살된 할아버지인데 한 3년 전에 같이 살던 부인이 돌아가셨데요.


그래서 홀로 아파트에서 사시는데 아들 내외가 보기 안됐으니까 아파트를 팔고 집으로 들어오시면 잘 모시겠다고 몇 년 동안 사정사정했데요.


그래서 그 할아버지가 집을 정리하고 아들집으로 들어갔던가 봐요. 물론 들어갈 때는 지참금 같은 것을 가져갔겠죠. 어디 빈손으로 갔겠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한번은 무얼 찾을 일이 있어서 아들 며느리 방에 들어가게 됐데요. 한참을 무얼 찾다가 가계부가 눈에 띄어 무심히 훑어보니까 글쎄 지출항목에 '촌놈 용돈 2만원'이란 기록이 보이더라는군요. 시아버지한테 용돈 주는 것을 '촌놈 용돈 2만원'이라고 했던 거죠.


가계부를 본 할아버지는 큰 충격을 받고 그날로 집을 나왔데요. 이게 모두 사실입니다. 저도 이 말을 전해 들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늘날, 가정이 해체되어 갑니다. 그 자리에 빈 썰렁한 가옥만 남은 집안이 많습니다. 따뜻한 가정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썰렁한 빈 가옥만 남은 집안이 한 두 집이 아닙니다.


가정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족이 한데 모여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곳입니다. 밖에 나가서 지치면 돌아가 편히 쉴 수 있는 곳입니다. 어느 때든지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고 받아들이는 곳입니다.


전통적인 가정에서는 가장이 있고, 주부가 있고, 부모님이 계시고 자식들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집안을 지키고 보살피는 수호신이 있습니다 .


훈김이 돌지 않는 가정은 온전한 가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혼이 빠져나간 몸뚱이나 다름없습니다.


가족끼리 대화가 단절되고 있습니다. 한데 모여 식사를 하고 같이 어울려야 되는데 각각 다릅니다.


일하는 시간도 다르고 하는 일들도 다르기 때문에 가족끼리 거의 대화가 단절되고 있습니다. 대화가 단절된다는 것은 비극의 싹입니다.


한집안 식구들끼리 살면서 대화가 끊어지고 있어요. 묻고 답하는 게 대화가 아닙니다. 어떤 공통적인 지적 관심사가 있어야 그걸 주제로 해서 속의 말을 털어 놓지 않습니까. 대화가 끊어지게 되면 가정이 삭막해져요.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날까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죠.


한 마디로 해서 제 자신부터 너무나 임기응변적이고 자기본위로 살아가기 때문에 가족과 이웃간의 단절현상이 오는 것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가족끼리 서로 닮아가요. 그러나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따로 놉니다. 이걸 일러 콩가루 집안이라 하잖아요. 자기 가정에 들어와서 평온한 분위기를 누릴 수 있는 게 가장 행복한 사람이에요. 건전한 사회는 말할 것도 없이 건전한 가정을 기반으로 이루어집니다.


사회의 구성요소 중의 하나인 가정이 해체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사회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겁니다. 붕괴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릇가게 하는 사람 이야기를 들으니까 요 근래 그릇이 잘 팔리지 않는데요. 음식 담아먹는 그릇이 왜 안 팔릴까요? 물론 외식문화의 영향일 꺼에요. 밖에 나가 먹길 좋아하니까요. 또 집안에 거의 손님을 초대하지 않는 것도 있지요. 옛날과 달리 집안에 손님을 거의 초대하지 않습니다. 가까운 친구끼리도 밖에서 만나지 집안으로 불러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친구네가 어떻게 하고 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어요.


(텔레비젼) 연속극의 아무개 집 처지는 잘 알면서도 막상 가까이 지내는 그 친구의 집안 사정은 전혀 알지 못한다니까요. 이렇게 살면 사생활이 보호받을지는 모르지만 인간의 영역은 점점 왜소해집니다. 인간의 설 자리가 점점 비좁아져요.


가까운 이웃이 찾지 않는 집 ,친구들이 찾아갈 수 없는 집은 진정한 집이 아니에요. 옛날하고 달라서 요즘 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 집에서 태어나지 않습니다. 집 밖의 병원에 가서 태어나요.


돌잔치 , 생일찬치, 환갑잔치, 칠순, 팔순, 구순잔치 모두 밖에서 하잖아요. 죽음까지도 자기 집에서 맞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집은 무엇 때문에 있습니까? 집은 뭐하는 곳입니까?


내 집 마련을 위해서 몇 십년 동안 애를 쓰다가 집이 생기면 좋아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따뜻한 가정을 놓고 차디찬 가옥만 남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들이 하루 하루 살아가는 순간들은 어떻게 보면 지극히 평범합니다. 맨날 그날 그 날이 아닙니까?


그러나 사실은 그 순간들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어요. 그 순간이 없다면 삶이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한 개인의 삶이 그 순간순간에 이뤄지고 있는 겁니다. 또한 그 순간들이 쌓여서 한 생애를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순간을 헛되이 보내면 삶이 소홀해져요.


인간의 삶을 지탱해주는 받침대는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입니다. 사람된 도리를 하는 일이지요.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자신의 의무를 지고 나옵니다. 이때 그러한 일을 하는 것은 곧 사람입니다. 그가 하는 일을 통해서 또한 그 사람이 거듭 거듭 형성되어 갑니다. 따라서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느냐가 중요합니다.


친구를 만날 때나 직장에서 일할 때나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는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을 불교적 용어로 용심이라고 합니다. 마음을 활용하는 거지요. 현대인들은 속도와 돈에 정신이 팔려서 성실성을 잃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쉽게 대충대충 넘기려고 하지 그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과 사람이 하나가 되지 못합니다. 일과 사람이 하나가 될 때에는 그 일을 통해서 그 인간이 성숙해질 수 있습니다. 어떤 직장에서 무슨 일을 하던 간에 그 일을 통해서 기능으로 숙달이 되어야겠지만 인간적으로도 성숙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좋은 일터에서 좋은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다음에 봉급이 많고 또 남이 부러워하는 기능을 지녔다 하더라도 인간적으로 성숙해질 수 없다면 썩 바람직한 일은 아닙니다.




요 며칠 전 누가 불쑥 저한테 묻더군요. “스님, 중노릇하는데 가장 어려운 일은 뭡니까.”라구요.


인간관계입니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는데 제일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가장 어렵습니다. 관계가 원만하면 우리 마음이 편하고 느긋해집니다. 그러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그럼 원만한 관계를 이루려면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만나는 사람마다 가족이 됐건 직장동료가 됐건 혹은 친구가 됐건 만나는 사람을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의 삶은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둡고 추하고 모자라고 온갖 고통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굳이 신문, 방송을 듣지 않더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을 보면 늘 사건사고가 끊일 날이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될 것인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사물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가짐이 바로 사물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20년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때 저는 어떤 분을 만나 상담을 해 주었는데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얼마 전 그 당사자 분을 만나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그 주부는 40대 초반이었는데 너무도 이기적인 남편에게 시달려서 이혼을 결심했었데요.


남편은 전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데요. 예를 들면 선풍기를 틀어도 자기 쪽으로만 돌리고 텔레비젼 프로도 자기위주로만 보고 꺼 버린데요.


대학출신이지만 책은 전혀 읽지 않고 몸에 좋다는 것은 어떻게든 구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혼자서 야금야금 먹었다는군요.


동물은 자신이 필요한 만큼만 먹는데 사람들은 필요 이상으로 먹어대지 않습니까. 또 몸에 좋다면 기를 쓰고 모두 구해다 먹잖아요.


그 주부는 아이들을 셋이나 기르면서 자기 삶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데요. 그래서 자기실현을 못한 것은 아쉬워하면서 드디어 이혼을 결심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때의 말을 다 잊어버렸는데 그 때 제가 그분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군요.


'식사준비를 할 때 이 얄미운 녀석한테 밥 준다고 절대 생각하지 말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마음가짐으로 하십시오.'라고 이야기 했데요.


또' 식사 준비할 때도, 차를 만들 때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그런 마음가짐으로 하십시오.'


'아이들 아버지가 저녁때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부처님이 돌아오신다고 반기세요.'


'밖에 나갈 때 뒷 모습을 보고도 부처님 뒷모습이라고 생각하십시오.'라고 말했데요.


그러니까 다른 종교이신 분들은 부처님 대신 주님이라든가 천주님이라든가 알라신으로 느끼면 편하겠습니다. 꼭 불자만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이든 천주님이든 상관없습니다.


음식을 준비할 때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생각을 하라는 겁니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은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사람이 불결하면 굶는다는군요.


마음가짐과 몸가짐이 불결한 것을 음식으로 먹으면 나에게 아무 도움이 안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차라리 굶은 것이 낫데요.


우리가 식중독에 걸렸다고 할 때 단지 음식에 세균이 숨어서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음식을 만든 사람의 마음씨가 독하고 미운 생각이 들어 있으면 제대로 소화를 시킬 수가 없지요. 왜냐면 음식 만드는 것은 손발이 하는 일이 아니라 마음이 하는 일이기 때문이지요.


직장에서 아이들 아버지가 돌아올 때도 '집에 또 오네.'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집에 들어오면 '부처님이 일을 마치고 돌아오시는구나.'라고 생각하십시오.


또 밖에 나갈 때 현관의 뒷모습을 보고도 '부처님 뒷모습이다.'라고 생각하십시오. 그 분 이야기가 처음에는 제 말이 와 닿지 않더래요.


그러나 마음공부 삼아서 하루 하루 그렇게 대했더니 점점 자신의 마음에 변화가 생기더라는거에요. 마음이 서서히 풀린거죠.


마음가짐이 달라지니까 상대방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다 사라지고 없더래요.


그렇습니다. 내 마음이 천당도 만들고 지옥도 만듭니다.


관계란 이런 겁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라는 게 바로 이런 겁니다.


서로 마음을 주고 받는 거죠. 맞서면 서로 상처를 줍니다.


맞서면 부부만이 아닌 그것이 친구가 됐건 스승과 제자가 됐건 혹은 동료가 됐던 애인사이가 됐건 서로 상처를 입힙니다. 그러나 생각을 돌려 마음을 편한 쪽으로 돌이키면 온전히 본래 자기 자신으로 돌아갑니다. 자아실현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젠 마음공부를 착실히 한 그런 결과로 위태롭던 가정도 다시 회복되고 자식들도 어디다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번듯하게 성장해서 가정의 위기를 극복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요즘 걸핏하면 이혼하기를 식은 죽 떠먹듯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혼한다고 해결이 되는 건 아닙니다. 매듭이 풀리는 게 아니지요. 왜 내가 그런 여자 그런 남자를 만나서 이 고생을 하는가 하고 묻겠지만 그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선을 잘못 봐서 순간의 선택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업을 고쳐야 매듭이 풀리지 내 업은 고치지 않고 이혼만 백날 해보세요 해결이 안됩니다. 자기 자신을 투철하게 들여다봐야 합니다. 자신의 실체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왜 그 사람을 만나서 그렇게 사는 겁니까. 그게 업입니다. 업을 고치지 않고는 매듭이 풀리지 않습니다.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인간의 덕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참고 견딜 줄을 모릅니다. 어느 때 부터(자녀를) 하나 둘 밖에 안 낳으니까 아이들 뜻을 즉석에서 다 받아들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참고 기다릴 줄을 몰라요. 이런 상태에서 이 사람들이 커서 한 가정을 거느릴 수 있겠습니까. 결국 참고 견디지 못하고 이탈하는 겁니다.


부처나 보살을 먼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절에 부처와 보살은 없습니다.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내 안에 잠들어 있는 부처와 보살을 일깨워야 됩니다. 이렇게 화창하고 눈부신 봄날 꽃구경가지 않고 뭐 하러 절에 왔습니까?


뭔가 일상생활에서 성이 차지 않으니 새로운 무엇을 찾기 위해 오지 않았습니까. <화엄경>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 이 셋은 결코 차별이 없다. 마음이니 부처니 중생이니 하지만 이 세상은 결코 근원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겁니다. 표현만 다르지 하나라는 겁니다. 그러니 부처와 보살을 먼 곳에서 찾지 마십시오. 부처와 보살을 밖에서 만나려 말고 때로는 자기 집안으로 불러들일 수도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하면 시들했던 관계도 새로운 활기로 채워집니다. 또 가옥이 다시 가정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삶은 기쁨과 고마움으로 채워질 때 삶의 향기가 배어나게 마련입니다. 이게 바로 덕의 향기입니다.


삶이란 무엇입니까? 우리가 순간 순간 사는 삶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합니까? 이는 철학자만이 탐구할 명제가 아닙니다.


지금 현재, 이 순간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근원적인 물음입니다.


‘삶이란 무엇이고 나는 진정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이러한 근원적인 물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 몸뚱이는 유기체입니다. 껍데기인거지요. 흔히 제가 오랜만에 아는 분을 만나면 다들 저에게 '아이고, 스님 너무 야위였습니다.'라고 말하더군요. 사실 저는 그런 소리를 들을 적마다 다행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중이 살찐다고 생각해봐요. 시줏돈을 얻어먹는 사람이 디룩 디룩 살이나 찌고 돼지처럼 살이나 쪘다고 생각해봐요. 어떻겠어요. 내 몸은 유기체인 동시에 껍데기이지 알맹이가 아닙니다. 콩깍지와 콩이 다르듯이요. 몸은 콩깍지 같은 것으로 덧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콩은 세월의 풍상에도 아랑곳 없이 늘 새로운 싹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콩깍지를 벗어난다고 해도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그런 생명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우주의 에너지 같은 것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어떤 것이 참나인가. 우리는 몸에 너무 집착합니다. 몸이 곧 자신의 실체인 것처럼 늘 착각합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고 하면 국내외를 막론하고 뭐든 구해다가 기를 쓰고 먹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자주 가는 해외 관광지에 가면 우리 한글로 몸에 좋다는 약들이 선전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볼 때 마다 부끄럽고 창피하더군요.


몸에 좋다하면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고양이, 굼벵이, 능구렁이 이것까지 구해먹는 사람들이 진정한 자아는 까맣게 망각하고 있습니다. 콩깍지를 생각하면서 그 알맹이 콩은 생각하지 않는거죠. 진정한 자아를 위해서 아무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공부란 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참선하고 참회하는 일은 결코 몸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오늘 절에 이렇게 오신 것은 몸이 오는게 아닙니다. 일도 많은데 무엇이 끌어서 내 몸을 여기까지 데려왔을까요. 여기 안올 수도 있는데 한 생각이 일어나서 여기 오셨잖아요. 몸은 그저 따라올 뿐입니다.


그렇다면 마음공부란 뭡니까? 몸에 좋은 것이 아니라 기도하고 참선하고 참회하는 일은 몸을 위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면서 정진입니다.


이와 같은 정진을 거치면서 사람은 인간답게 성숙해 갑니다. 나이 먹을수록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숙하지 않고 옛날 그대로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혀 향상이 되어 있지 않는 제자리 걸음 상태인 것입니다.


각자 한번 물어보십시오. 내 자신, 자아의 실현을 위해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인생을 소모하고 있는데 과연 내 자아실현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를 물어 보십시오.


여기 저기 꽃이 피어나는 것을 구경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봄철에 내 자신은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한 번 되돌아보십시오.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는 건강한 나무가 아닙니다.


상록수인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 모두가 꽃을 피웁니다.


삶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될 것인지 거듭 물어야 됩니다.


산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해답은 그 물음 속에 있습니다.


과일에 씨앗이 박혀있듯이 해답은 물음 속에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고 그 해답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자신들의 삶을 저마다 꽃피우면서 사는 따뜻한 가정의 가계부에는 '촌놈 용돈 2만원'이 아니라 '부처님께 용돈 20만원'이라고 기록될 수 있습니다.


좋은 봄 맞으십시오. 저의 말을 이만 그치겠습니다.




※ 이 글은 지난 4월 17일(일)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 극락전에서 설해진 법정스님의 법문을 녹취, 정리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