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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9-03-04

    법정스님 “삶의 향기로움에 감사하라”(2008년 가을 대중법회)

본문


법정스님 “삶의 향기로움에 감사하라”

길상사 가을 법회서 법문




 조계종 원로 법정 스님은 길상사에서 가을맞이 대중법회를 통해 법문했다. (사진제공=길상사 홈페이지)


깊어가는 가을, 초록 잎의 자성(自性)에는 본래 붉은 빛도 지녔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시간이다. 뜨거운 태양에 온 몸을 드러내 보인 나뭇잎이 그간의 인고를 붉은 훈장으로 당당히 드러내듯 가을은 세상 만물을 역동적인 흐름 속에 나름의 빛과 형태로 진지하게 담아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서울 성북동에 자리한 ‘맑고 향기롭게’ 근본도량 길상사에서는 조계종 원로 법정 스님을 모시고 가을맞이 정기 대중법회가 열렸다. 글과 법문으로 참 삶의 지혜를 일러주시는 스님의 가르침을 올 가을 또 하나의 풍성한 결실로 맺어보는 자리다.

10월 19일 일요일 오전 10시, 길상사 극락전을 중심으로 도량 곳곳에는 스님의 법문에 마음의 귀를 기울여 보고자 하는 2000여 명의 불자들이 운집했다. 예불을 모시고 관세음보살 정근에 이어 법정 스님의 가을법문을 경건히 청했다.

법정 스님 법문의 주요 내용을 정리했다.





 법정 스님의 가을맞이 대중법회.


청명한 가을을 사노라면 삶이 풋풋하고 감사해집니다. 도심도 그러하겠지만 산중 생활도 날씨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날이 우중충하고 비바람이 치면 괜히 짜증이 나지요. 오늘 같은 날은 마음도 활짝 열려서 매우 즐겁습니다. 연일 맑게 갠 가을 날씨 덕에 저도 여러 가지로 일상을 흥겹게 지내고 있습니다. 빨래를 널면서 서정주의 시 ‘푸르른 날’을 외워봅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이렇게 두런두런 시를 외다 보면 더 마음이 흥겨워지고 사는 일이 새삼 즐거워집니다.


시는 언어의 결정체입니다 그 안에 우리말의 넋이 살아있습니다. 시를 외다보면 그 안에 아름다운 우리말 속 얼굴이 투명하게 드러납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 시를 읽어보십시오. 지난 날 소년ㆍ소녀 시절을 기억하시나요? 세월이 흘러 까맣게 잊은 망각된 그 무엇이 있지요. 시를 읽으며 삶을 새롭게 가꿀 필요가 있습니다. 시를 읽으면 피가 맑아집니다. 험한 세상에 무뎌진 감성의 녹이 벗겨집니다.


저는 요즘 밤마다 ‘왕유’와 ‘백낙천’의 시를 읽다보면 세삼 사는 일이 고마워져요. 우리는 요즘 눈을 뜨기 무섭게 지겹고 짜증스런 뉴스에 크게 위축되고 있습니다. 경제를 살리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널뛰는 경제에 갈팡질팡 쫒기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과연 ‘가진 것만큼 행복한가?’ 스스로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많이 가진 자들이 과연 행복한가요? 그렇다고 해서 많이 가지지 못한 이들은 불행한가요? 우리는 행ㆍ불행의 평가를 다시 해야 합니다. 많이 가졌으면서도 베풀 줄 모른다면 불행한 것이고 적게 지녔지만 많이 베푼다면 충분히 행복합니다. 그러니 불행과 행복은 외부상황이나 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적 수용 여부의 받아들이는 삶의 자세에 달려있습니다. 요즘처럼 들려오는 소식에 휩쓸리다보면 자신이 너무 외소해지고 무력해집니다. 삶에 자신을 잃고 끊임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이런 외부 현상만이 삶의 전부가 아닙니다. 눈을 안으로 돌리면 향기로운 영역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밤낮 귀 기울이는 뉴스에 얽매이면 삶이 시들어갑니다. 그런 외압에 눌려 내 안의 힘을 일깨우려하지 않아지게 되고 삶이 지겹고 시들해지죠.



 법정 스님의 가을맞이 대중법회.


옛 선현들의 삶으로부터 배울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250여 년 전 선비 장혼의 글 ‘평생의 소망’ 가운데에는 인왕산 골짜기 아래 허름한 집 한 채에 매혹돼 그 집을 꾸미고 싶은 소망에 부풀어 있는 바람과 만납니다. 엽전 500냥의 시가를 지닌 집을 사서 집 둘레에 꽃을 가꾸는 꿈에 마음에 들떠있죠. 그는 평생 소망의 주거 공간을 제시합니다. 내가 누리는 행복ㆍ일상에 쓰는 도구ㆍ늘 하는 일ㆍ귀중히 여기는 책ㆍ즐기는 경치 조심할 것 등을 차례로 나열합니다. 그 중 ‘맑은 복 여덟 가지’를 들어 보입니다. 당시는 영ㆍ정조시대로 문예 부흥기였습니다. ‘태평 시대에 태어난 것 ㆍ서울에 사는 것ㆍ다행히 자신이 선비 축에 낀 것ㆍ문자를 대충 이해하는 것ㆍ산수가 아름다운 산을 차지한 것ㆍ꽃과 나무 천 그루를 지닌 것ㆍ마음에 맞는 벗을 얻은 것ㆍ좋은 책을 소장한 것’을 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가운데 어떠한 맑은 복을 누리고 지녔는지 들춰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맑은 복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는 새삼 제 삶의 처지를 생각했습니다. 경전이건 글이건 자기 자신의 삶이라는 거울에 비춰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책을 읽는 의미가 있습니다. 책을 통해 자신의 처지를 거울로 삼는 것이죠.


나날이 새로워지려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 뒤에서 내 자신을 받쳐주고 있는 까닭입니다. 바로 스승과 말벗이 될 수 있는 몇 권의 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고맙습니다. 또한 출출해 지거나 무료해 지려 할 때 마시는 차가 있습니다. 산중에 기거하면서 차 맛을 모른 다면 무슨 낙으로 살까 문득 생각했습니다. 차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는 삶의 맑은 여백과 같은 것이죠. 더불어 굳어지는 삶에 탄력을 주는 음악이 있고 내 일손을 기다려주는 채소밭이 있다는 사실이 고맙습니다. 채소밭이 내 삶을 녹슬지 않게 받쳐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우리는 바쁜 일상 속에서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한적한 삶을 살고 싶은 꿈을 지니고 있습니다. 한가하게 그동안 누리지 못했던 바를 누리고픈 소망이죠. 그런 꿈은 지닌 것 자체로 풋풋한 가슴을 선물합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본능적인 소망이죠. 앞서 말한 선비의 소망과 같지요. 미래를 설계하는 상상만으로도 현재의 삶은 풋풋해 질 수 있습니다. 일상에 찌들지 않는 꿈을 꿔보십시오.


송나라 시인 소동파는 ‘적벽부’에서 ‘저 강물의 맑은 바람과 산중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들으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니 빛이 되는구나. 가지고자 해도 말릴 사람 없고 쓰고자 해도 다할 날 없으니 이것은 천지자연의 무진장이로다’라고 했습니다. 우리 자연에는 천지자연의 소산들이 무진장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관심이 없지요. 이러한 자연을 즐길 줄 아는 이는 흔치 않습니다.

남은 평생에 둥근 달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요?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때그때 감사하게 받아 지닐 수 있어야 합니다. 강산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그것을 보고 느끼면서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바로 강산의 주인입니다. 관심을 안으로 기울이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들이 무수합니다. 그러나 눈을 밖으로만 팔기 때문에 외부 상황의 덫에 걸려 삶을 진실되게 파악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감싸주고 먹여 살려주는 무진장한 자연이 널려 있는데도 불구하고 정신이 밖으로만 쏠려 그것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좋은 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들이 무수히 있는 것입니다. 이 순간에도 병원에서 사경을 해매는 환자들은 단 몇 분만이라도 생명을 유지하고 싶어 간절히 소망하는 삶인데 말입니다.


존엄한 목숨을 무가치하게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아쉽습니다. 자기 혼자만을 위해 살거나 이유를 불문하고 스스로 목숨을 내던진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공간적으로 떨어져 지낸다 하더라도 수많은 이웃들과 함께 삶의 흐름을 이루고 있습니다. 자신이 원하건 원하지 않건 간에 말입니다. 제 기분대로 그 흐름을 이탈하는 것은 명예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길상사 도량에 법정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모인 불자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삶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동서고금의 선각자들이 체험을 통해 말씀하신 바입니다. 자살은 스스로의 자해로 인한 업(業)을 짊어지고 다음 생으로 이어지도록 하는 윤회의 사슬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은 업이 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죽고 싶다고 생각 하면 결국 죽습니다. 업의 파장이죠. 업의 파장을 따라 단 한 번에 끝나지 않고 습관이 됩니다. 그것은 업력이 되고 업장으로 굳습니다. 마치 물리학의 관성 법칙과 같이 습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겪는 망막한 고통은 늘 지속되는 것이 아닙니다. 흐린 날이 있으면 반드시 맑은 날이 있습니다. 삶은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쨍하고 해 뜰 날이 온다는 노래가 있잖습니까? 외부 상황이 변하듯 내면적인 생각도 시시각각 변화합니다. 자살 충동을 겪는 이들은 당시의 절망감에서 추락해 버리는 것이죠. 망막한 덫에서 벗어나 맑은 정신으로 인간 삶을 살필 수 있었다면 그 한 때의 외골수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시야로 새로운 자기 삶을 실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 가지 우환이 있을 때는 마치 영원히 지속될 것 같지만 그것은 한 때입니다. 어려운 것은 고정돼 있지 않고 변합니다.


어려움이 닥치면 혼자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일방적인 늪의 고정관념에서 헤어 나오기 힘듭니다. 가까운 친구를 만나서 짐을 나눠야 합니다. 절은 항상 문이 열려 있습니다. 종교는 그것을 깨우치게 하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혼자서는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해결기약이 없습니다.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제 명대로 살다가 가지요.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의 현상입니다.


우리는 지금 살아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당연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 고마움을 세상과 함께 나누기 위해서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좋은 가을을 맞이하십시오.

가연숙 기자 | omflower@buddhapi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