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청량사 자연문화유적 탐방
12월 6일 청량산으로 자연문화유적탐방을 떠납니다.
출발장소: 만촌동 이마트 9시 출발
준비물: 동참금 1만5천원, 도시락, 간식, 겨울산행복장, 개인물품.
아래글은 매일신문 기사를 옮긴 글입니다. 참조하세요.
변산과 매창(梅窓), 오대산과 세조, 팔공산과 왕건```. 명산과 명사(名士)의 조합은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요산요수(樂山樂水) 명구(名句)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산수(山水)를 지향한다. 선조들은 수묵으로, 시가(詩歌)로 로맨스로 산자락마다 흔적을 남기며 산의 상징들을 만들어냈다.
명산과 명사의 에피소드도 청량산에 와서는 수준을 달리한다. 시대를 초월해 당대의 석학`왕족들이 봉화를 드나들었다. 원효, 최치원, 퇴계 같은 고승`석학이 줄을 이었고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피란처로 요람을 폈으며 명필 김생은 토굴을 파고 밤낮으로 먹을 갈았다. 한국 5악에도 못 드는 영남 북부의 조그만 이산에 위인(偉人)들의 발길이 이어진 이유는 뭘까.
◆12개 암봉 도열```명당 요소 두루 갖춰
경북 봉화 낙동강 상류에 솟아오른 청량산은 산세는 크지 않으나 기암절벽이 어우러져 예부터 작은 금강산으로 불렸다. 최고봉인 장인봉을 비롯해 자소봉, 탁필봉, 경일봉 등 12개의 암봉이 기치를 세우며 도열해있다. 이 산자락을 따라 8개의 굴과 4개의 약수, 3개의 사찰이 들어섰다.
풍수가들은 청량산은 명당 요소를 두루 갖춘 터라고 말한다. 산을 둘러싼 12봉우리는 연꽃잎에 비유되며 청량사는 바로 연꽃의 수술자리에 해당한다. 안식과 생산과 풍요가 넘치는 길지(吉地)인 것이다. 일찍이 유년시절부터 청량산에 반해 평생을 드나든 퇴계는 “12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白鷗)뿐”이라며 무한한 애정을 나타냈다.
들머리 입석엔 생강나무의 노란 단풍이 한껏 멋을 냈다. 굴참나무와 굴피나무도 산중턱에서 색깔을 키웠다. 청량산은 주왕산, 월출산과 함께 ‘3대 기악’(奇嶽)의 하나.
청명한 가을하늘 밑으로 파스텔톤 수채화가 투명하게 펼쳐졌다. 오색의 나뭇잎은 각기 5색 음표가 되어 온산에 가을 선율을 뿌려 놓는다. 산행 입구에서 응진전(應眞殿)과 만난다. 금탑봉 아래 자리 잡은 응진전은 신라 문무왕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암자. 천 길 낭떠러지에 걸치듯 세워놓은 암자가 보기에도 아찔해 보인다. 홍건적 2차 침입 때 공민왕이 노국공주와 함께 이곳에서 피란을 와서 불공을 드린 곳으로 유명하다.
◆명필 김생, 암자 세우고 붓글씨 연마
다리가 뻐근해지고 숨이 차오를 때 쯤 김생굴로 향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이곳은 통일신라시대 명필 김생이 수학했던 곳. 3, 4평쯤 될까. 김생은 이곳에 암자를 짓고 10년 동안 서예를 연마했다고 한다.
바로 옆엔 최치원이 마셨다는 샘인 ‘총명수’가 등산객들의 목을 축여준다. 김생굴은 그리 높지 않지만 뜰 앞에 서면 청량산 위용이 한눈에 들어온다. 김생은 창검처럼 날을 세운 산봉우리를 보며 호연지기를 키웠고 산세를 고스란히 그의 필체에 불어넣었다.
일찍이 단장(短杖)을 짚고 김생굴에 오른 주세붕은 “글자의 획이 뾰족하고 굳세어 마치 바위들이 다투는 듯하였다”하고 “지금 이 산을 보니 김생이 여기서 글씨를 배웠음을 알겠다”고 감격해 했다.
김생굴에서 급경사를 오르면 경일봉(擎日峰)이 나온다. 이름대로 아침 해를 맞이하기에 좋은 조망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다시 능선을 따라 40분쯤 진행하면 자소봉이 나타난다. 이곳은 청량산 최고의 조망 터. 이름값을 하려는지 철계단을 오르고 급경사 길을 두세 바퀴를 돌고나서야 겨우 표지석을 허락한다. 북쪽에서 청옥`두타산이 멀리서 실루엣을 펼치고 동쪽으로 일월산이 시야를 간지른다.
철계단을 내려와 이 곳 최고의 명물 ‘청량산 하늘다리’로 향한다. 가을 능선길, 수목들은 안식을 위해 잎들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산속에도 중력은 어김없이 작용하고 잎들은 각양(各樣)대로 궤적을 그리며 떨어진다.
◆국내 최장 청량산 하늘다리
청량산 하늘다리는 자란봉과 선학봉을 잇는 현수교. 길이도 90m로 강천산(75m)을 제치고 국내 최장을 자랑한다. 이 봉우리 덕에 장인봉~전망대 왕복 시간이 30분 정도 단축됐다. 난간에 기대 축융봉을 내려 보면서 자꾸 커피생각이 났다. 아름다운 풍경이 달콤한 미각을 불러냈을 것이다. 다리 한복판에 일부러 투명아크릴 바닥을 만들었다. 몇몇 여성들이 비명을 질러댄다. 비경과 공포의 양립, 이곳에서 즐길 수 있는 체험이다.
기왕 청량산행에 나섰으면 장인봉~전망대까지 다녀오기를 권한다. 고생한 만큼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중간에 만나는 장인봉 표지석에서 김생의 필체와 만날 수 있다. 기운차게 뻗어나간 획과 터치에서 힘찬 기운이 느껴진다. 장인봉 바로 앞 아찔한 절벽 끝에 전망대가 있다. 가파른 벼랑 너머로 명호면 쪽 풍경이 정겹다. 투구봉을 휘감은 낙동강도 가을햇살에 은비늘을 털며 안동호로 흘러간다.
봉화 뜰을 렌즈에 담고 나서 청량사로 내려선다. 청량사 법당의 유리보전은 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보전의 현판은 공민왕의 친필로 전해진다. 이곳에 모셔져 있는 약사여래불은 지불(紙佛)로 지금은 금칠로 단장해 있다.
어느 곳에도 문인들의 흔적과 에피소드는 있다. 그러나 청량산처럼 우리 역사를 관통하며 당대의 학자, 예술가들이 운집한 경우는 드물다. 때로 산은 문학작품의 모델이 되었고 작품을 낳은 산실이 되기도 한다. 선비들은 이곳을 드나들며 청량산을 소재로 100편이 넘은 기행문을 썼고, 시로 남겨진 것만도 자그마치 1,000여수에 이른다. 이유가 뭘까. 경내에서 스친 노스님의 미소에 그 해답이 있을 듯싶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