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法 頂 (회주 스님)
파리 근교에 있는 명상의 집, 길상사는 둘레의 숲에서 들
려오는 새소리로 동이 튼다. 새벽 4시가 조금 지나면 목청
고운 새가 맨 처음으로 입을 열어, '밤새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보내오면 여기저기서 화답을 하듯 온 동네 새들이
잇따라 노래를 한다. 새가 '운다'고 하기보다는 '노래한
다'는 표현이 적절한 그런 새들이다.
무슨 새인지 그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절 안에 있는 벚나
무 가지 끝에 와서 쉬는 걸 보면 깃털은 잿빛이고 개똥지빠
귀를 닮은 새다. 우리 산천의 찌르레기만큼 부지런한 새인
데, 음조는 찌르레기처럼 극성스럽지 않고 아주 맑고 리드
미컬한다.
새들이 마음놓고 깃드는 곳이라면 사람이 살기에도 쾌적
한 환경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2,30년 전만 하더라도
도시와 시골을 가릴 것 없이 사람들은 새소리를 들으면서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 그 새소리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
인간생활이 뿜어내는 온갖 독성과 매연과 소음으로 인해
무상으로 듣든 그런 자연의 노래는 더 들을 수 없게 되었
다. 새들이 사람들 곁을 떠나가는 이런 세월 속에서 지금
우리는 살고 있다.
유럽이나 미주쪽에 가서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은 높이 솟
은 빌딩이나 호화로운 저택, 번듯한 거리풍경이 아니다. 요
즘 우리나라 일부 철없는 아이들이 꼴같잖게 멀쩡한 머리털
에 물감을 들여 흉내내는 노랑머리도 아니고 짙은 향수 냄
새도 아니다. 사실 우리보다 훨씬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것은 곳곳에 울창한 숲과 끝없이 펼쳐
진 초록의 농경지다. 잘 관리된 울창한 숲과 광활한 농경지
가 우리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파리로 가는 시속 980킬로, 고도1만 미터 상공
의 비행기 안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면서 우리가 기대어 살
고 있는 지구의 실상을 이모저모 생각했다. 지도를 통해서
익혀 왔던 지점이나 그 언저리를 막상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면, 지도로 볼 때보다도 오히려 낮이 설다. 허상과 실
상의 거리를 실감한다.
그 날 나는 몽골의 가도가도 끝이 없는 메마르고 황량한
사막지대를 통과하면서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지구인
들이 요즘처럼 과소비의 잘못된 생활 습관을 고치지 않는다
면, 그리고 함부로 지구를 허물고 더럽힌다면 지구가 언젠
가는 이와 같은 불모의 사막으로 변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들어서 부쩍 잦은 전지구적인 기상이변은 이
런 재난의 예고가 아닐지 모르겠다.
서울에서 파리까지는 11시간이 걸린다. 그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에는 항공사끼리 경쟁이 붙어 그러는지 기내
식이 너무 자주 나온다. 나는 오후에는 먹지 않기 때문에
점심 한끼만 받아먹었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관찰자가 되
어 바라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어찌나 먹어대는지 그들의 왕성한 식성에 놀라
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사양하지 않고 주는 대로 받아
먹었다. 그때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비행기에 타고 있는 승객들이, 대단히 죄송한 표현이지만
마치 우리에 갇혀 사육되는 동물처럼 느껴졌다. 승무원들
은 친절한 사육사로 여겨졌고.
익히 알고 있듯이, 기내식이란 게 밍밍해서 별 맛도 없는
그렇고 그런 음식인데도 공것이라 그러는지 너무들 왕성하
게 먹어 치웠다. 사실은 공것도 아니고 항공요금에 다 포함
된 것이다.
우리 한국인들의 왕성한 식성은 세계에 널리 알려진 사실
이다. 가는 데마다 즐비한 음식점들, 한 집 건너 가든, 가
든. 그 이름만 들어도 속이 느글거리는 고기들.
도시와 시골을 가릴 것 없이 우리나라에는 음식점이 너무
많다. 전생에 못 먹어 굶어 죽은 넋들이 이렇게 많은가 싶
을 정도다. 병원마다 북새통을 이루는 것도, 따지고 보면
못 먹어서가 아니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너무 폭식, 폭음
한 끝에 생긴 병이 많을 것이다.
옛이야기를 들출 것도 없이, 사람이 한 생애를 두고 먹고
살아갈 음식의 양은 그가 일찍이 심은 복과 덕에 따라 한정
되어 있다. 평생을 두고 알맞게 나누어 먹을 음식을 탐욕스
럽게 한꺼번에 먹게 되면, 그 나머지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병들어 먹을 수 없어
죽어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디 먹는 것 만이겠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듣는 것
도 넘쳐나고 있다. 제 정신을 차리고 가려서 받아들이지 않
으면 그 속에 묻혀 침몰하고 만다. 여기에는 각자 투철한
삶의 원칙들이 있어 그것이 지켜져야 한다.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그것이 꼭 없어서는 안될 것인
지 그때그때 물으라. 없어도 좋은 불필요한 것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무가치한 일에 정신을 분산시키면
정작 가치있는 일은 할 수 없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에만 매달리지 말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
역도 넘어다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육신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 이 몸은 내 영혼을 담은 그릇이다. 자기 자신을 육신
과 동일시하는 사람은 때가 되면 그 육신과 함께 죽는다.
그러나 영혼을 자신의 실체로 생각하는 사람은 육신을 따
라 죽지 않고 영혼과 함께 살아간다.
다음과 같은 옛사람의 말이 있다.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업만 남아 따라온다.'
우리가 이 생을 마치고 떠나갈 때 무엇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인가. 지위도 명예도 아니고, 집도 가구도 돈도 아니다.
업(業)만 이 다음 생에까지 그림자처럼 따라간다.
업이란 무엇인가. 순간순간 내가 이 몸으로 움직이는 동작
과 입으로 쏟아내는 말과 마음 속으로 하는 생각이다.
다시 말하면 순간순간의 내 행위가 곧 내 자신을 만들어 간
다는 뜻이다. 지금 그 자리에서 그렇게 살고 있는 생활태도
가 지금의 당신이고 또한 미래의 당신으로 이어진다.
깊이 새겨 들으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