法頂(회주스님)
이른 아침부터 오두막 둘레에는 꾀꼬리가 맑은 목청으로 노래하고 있다. 이것은 초여름 싱그러운 숲의 음악이다. 이런 음악은 종일 들어도 물리거나 싫증이 나지 않는다. 이처럼 싱그러운 자연의 소리를 듣고도 잠자리에서 뭉그적거리며 일어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구제불능의 게으름뱅이다.
이른 아침으로 노래하는 꾀꼬리 소리에 고랭지의 모란도 잠에서 깨어나 투명한 자줏빛으로 노래에 화답하고 있다. 5월 하순.
자, 그럼 나는 무엇으로 꾀꼬리의 노래에 화답할 것인가. 차의 향기로나 화답을 할까. 5월은 햇차의 향기가 은은히 번지는 그런 계절이다.
차를 즐기는 것은 단순히 목이 말라서가 아니라 맑음과 고요와 그 향취를 누리기 위해서이다. 차는 빛깔과 향기와 맛이 두루 갖추어져야 온전한 것이라지만 그 중에서 하나를 가리라면 나는 선뜻 그 향기를 취하겠다. 차의 향기는 단연 첫째 잔이 좋다.
몇 해 전부터 내 다실에서는 그 해에 나온 차의 품평을 메모하고 있다. 차의 이름과 그 산지와 다원, 빛과 향기와 맛과 차잎의 여리고 거침, 차잎의 정선 여부, 그 차에 대한 느낌, 그리고 등급. 등급은 A+에서 C-까지다. 판매에 영향을 끼칠까봐 공개적으로는 말하지 않지만 사석에서는 그 해의 좋은 차에 대해서 더러 언급한다.
선물 중에서도 차의 선물이 유달리 반갑고 고맙게 여겨진다. 차가 맑고 향기로운 것이므로 부담스럽지가 않다. 다 겪어서 아는 바와 같이 차의 선물은 햇차가 나왔을 때 받는 것이 보다 반갑고 고맙다. 철이 바뀌고 나서 받는 차 선물은 신선도가 가시고난 차처럼 반가움의 향기도 그만큼 덜하다. 발효차의 경우는 예외이지만.
정제된 차는 좋은 물을 만나야 그 빛과 향기와 맛을 온전히 낼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차일지라도 물이 좋지 않으면 차안에 비장된 그 향기와 맛이 우러나지 않는다. 그래서 차맛은 물이 좌우한다. 산중에서 흐르는 시냇물을 길어다 마실 때의 향기롭던 그 차맛이 외국에 가서 마시면 똑같은 차인데도 향기와 맛이 떨어진다. 석회가 섞이거나 철분이 많이 든 물로는 차의 향기와 맛이 제대로 우러나지 않는다. 그들이 녹차 대신 발효된 차를 즐겨 마시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이것은 차와 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의 일에도 해당될 것이다. 좋은 짝을 만나야 그가 지닌 특성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삶을 아름답게 누릴 수 있다.
차의 투명한 빛깔은 정선된 차에서만 우러난다. 차를 다 우리고 나서 퇴수그릇에 차잎을 쏟아 보면 그 차를 만든 사람의 심성을 엿볼 수 있다.
지난 해의 경우 지리산 쪽에서 나온 차 중에는 차의 꼬투리 뿐 아니라 찻잔에 침전된 모래 먼지가 많았다. 특히 정선되지 않은 차에 많아 마시기가 거북스러웠다. 봄 가뭄에다 황사가 심했던 때문일 것이다. 제다 과정에 물로 살짝 씻어내는 체계를 갖춘 차에서는 그런 모래 먼지는 전혀 없다. 차를 만드는 사람들은 이 점에 마음을 써야 할 것 같다.
한 잔의 차를 대할 때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그 빛깔이다. 정선되지 않은 차는 찻잔에 따른 그 빛깔이 맑지 않고 부옇다. 마시고 싶은 생각이 달아난다. 차를 마시고 나서도 개운치 않은 뒷맛은 제대로 된 차가 아니다.
아주 여린 차잎으로만 만든 정선된 차를 대할 때 차를 만든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를 한 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한 잎 한 잎 정성을 기울여 만든 그 마음의 향기가 귀하다.
진정으로 차를 즐기는 사람은 차를 마실 때 그 차가 지닌 빛깔과 향기와 맛만이 아니라 그 너머에 있는 것까지도 함께 음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차를 마시고 나서 때로는 앉은 자리에서 옛 다서(茶書)를 들추어보면 또 다른 차의 향기와 맛을 음미할 수 있다.
불교의식 중에 다음과 같은 차의 게송이 있다. 옮겨 보면 이렇다.
온갖 초목 중에서 뛰어난 이 맛을
조주스님 몇 천 사람에게 권했던가
돌솥에 좋은 물로 달인 이 차를 드시고
영가여,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소서.
향기로운 한 잔의 차는
자신을 바쳐 중생의 갈증을 풀어줍니다
법의 진미 넘치는 이 공양 받으시고
덧없는 애정의 갈증을 푸소서.
한 잔의 차가 우리 앞에 오기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숨은 공이 들어 있다.
차씨를 뿌려 차나무를 가꾼 사람의 공,
한 잎 한 잎 차잎을 따서 만든 사람의 공,
그 차를 멀리서 보내준 사람의 공,
다기를 만든 사람의 공,
다포와 차수건을 만든 사람의 공,
차수저며 찻잔 받침대 등을 만든 사람의 공,
그리고 물과 불의 은공,
햇볕과 비와 이슬과 구름과 맑은 바람과 겨울에 내린 눈과 별빛과 달빛의 은공 등….
이 것 저 것 헤아리자면 자연과 수많은 사람들의 은혜가 한 잔의 차 속에 배어 있다. 그러니 차를 마실 때 건성으로 마시지 말고 이와 같은 은공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고마운 마음으로 음미해야 한다.
향기로운 한 잔의 차 속에 우주의 신비가 스며 있다. 저 꾀꼬리의 맑은 목청에 우주의 가락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