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향기롭게 소식지 8월호에서
걷기 예찬
法頂(회주스님)
사람이 일반 동물과 크게 다른 점은 꼿꼿이 서서 두 발로 걷는 기능에 있다고 인류학자들은 말한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사람들은 자동차에 너무 의존하면서 직립보행(直立步行)의 그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내 자신의 경우만 하더라도 먼길을 오고 갈 때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시간상으로는 걷는 일보다 타는 일이 더 많다.
그 때마다 내 몸이 퇴화되는 듯한 느낌이다.
자동차로 인해 행동반경은 넓어졌지만 내 다리로 땅을 딛고 걸을 때의 그 든든함과 중심 잡힘이 소멸되어 가는 듯 싶다.
의사들마다 건강비결로써 두 가지를 들고 있다. 많이 걷고 생수를 많이 마시라는 것. 옳은 말이다.
그 어떤 운동보다도 많이 걸음으로써 신체가 조율되어 활기차고, 생수를 마셔 신진대사를 활발히 함으로써 건강할 수 있다.
산에 들어와 살면서 나도 많이 걸었었다.
행자시절에는 미륵산에서 통영시내까지 왕복 30리 남짓 되는 돌자갈 길을 걸망을 메고 장을 보아 날랐다.
50년대 중반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 살 때는 이따금 왕복 80리가 넘는 구례장까지 다녀오곤 했었다.
해인사 시절에는 몇 개의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고 다시 가파른 목통령을 넘어 경북 금릉군에 있는 청암사를 찾기도 했다.
아마 50리도 넘는 산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통도사에서 살 때는 한 여름 영축산을 넘고 재약산을 넘어 밀양 표충사에 가기도 했었다.
지금이라면 누가 걸어서 가겠는가. 차로 가면 모두 한 시간 안에 닿을 수 있는 거리인데. 그러나 그 시절은 다행히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즐거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었다.
다비드 르브르통은 그의 산문집 <걷기 예찬>의 첫머리에서 말한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걷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걷기 예찬>에는 걷기의 중요성만을 강조하지 않고 걷기의 즐거움을 표현한 루소, 스티븐슨, 바쇼, 니코스카잔차키스며 소로우 등의 글들이 수록되어 있어 독자들은 즐겁게 따라 나설 수 있다.
17세기 일본의 방랑시인 바쇼는 그의 여행일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느 해부터인지 구름조각이 바람의 유혹에 못 이기듯 나는 끊임없이 떠도는 생각들에 부대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바다 기슭을 떠돌았는데 이윽고 지난 해 가을에는 강변에 있는 내 오두막에서 해묵은 거미줄들을 쓸어 내렸다.
이내 한 해가 가고 봄이 돌아오자 가벼운 안개 속을 지나 시라가와의 울타리 저 너머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불현듯 일었다.
족행신(足行神)이 내 정신을 흔들고 나그네 신들이 부르는 소리에 귀가 솔깃해진 나머지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헤진 바지를 꿰매고 갓끈을 손보는 즉시 벌써부터 마쓰시마의 달에 마음을 맡긴 채 다른 사람에게 내 거처를 넘겨주었다.’
옛 사람의 티없는 그 바람기가 한없이 부럽다.
나그네의 가슴 한 구석에는 이런 바람이 늘 불고 있을 것이다.
도보로 걷는 맛을 제대로 즐기려면 반드시 혼자여야 한다고 하나같이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유가 그 내재적 속성이기 때문이다.
소로우는 그의 일기에서 말하고 있다.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취미는 자연을 멀리함을 뜻한다.’
걷는다는 것은 침묵을 횡단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시끄러운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상 밖으로 외출하는 것이다.
걷는 사람은 끊임없이 근원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그리고 나는 누구인가?’
순례자란 무엇보다 먼저 발로 걷는 사람, 나그네를 뜻한다. 순례는 사람의 마음을 가난하고 단순하게 하고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털어낸다.
최근에 환경 관계 일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 기자가 내게 물었다.
‘스님들은 자연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살면서도 불사를 내세워 자연을 너무나 많이 훼손하고 있습니다.
스님은 이런 현상 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요즘 크고 작은 절에서 자행되고 있는 자연 훼손에 대한 지적을 받고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일부 사찰 운영자의 그릇된 견해와 공명심 때문에 막대한 시주금을 쏟아가며 절과 그 주변 환경을 망쳐놓는 일은 뜻 있는 사람들에게 지탄을 받아온 바다.
한 두 사람이 거처하는 조촐한 암자에까지 산을 허물어 찻길을 내는 것은 그 수행자의 자질을 묻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편리하게 살 바에야 목 좋은 큰절에서 살 것이지 어째서 자연을 훼손해 가면서까지 암자의 조촐한 분위기와 격을 떨어뜨리는지 같은 수행자로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 때 스쳐갈 나그네임을 생각한다면 자연 그대로를 유지 존속하는 것이 자연의 품안에 사는 사람의 도리일 것이다.
이 산하대지는 자동차의 타이어를 위해서보다는 우리의 두 발을 위해서 옛부터 있어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자연 속에는 미묘한 자력이 있어 우리가 무심히 거기에 몸을 맡기면 그 자력이 올바른 길을 인도해 준다고 옛 수행자들은 믿었다.
자동차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두 발로 뚜벅뚜벅 걷는 사람만이 그 오묘한 자연의 정기를 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