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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2-12-02

    다시 "월든"에 다녀와서 - 法頂

본문

첫마음 12월호


다시 ‘월든’에 다녀와서


法頂(회주스님)


월든(Walden)은 미국 매사추세츠주 콩코드시에서 남쪽으로 2km 남짓 떨어져 있는 호수다.

숲이 우거진 낮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다.


150여년 전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이 호숫가 숲 속에 오두막을 짓고 2년 2개월 동안 노동과 학문의 삶을 살면서 그의 사상이 무르익게 되고 도덕적 신조가 분명한 형태를 갖추게 된 그 영향으로 세계적인 호수가 된 것이다.


월든으로 갔을 때 그의 나이 스물 여덟이었고 책은 한 권도 저술한 적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 말고는 그를 알아볼 사람도 없었다.

월든 호숫가에서 지난 이 기간이 소로우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의미 있는 시기였다.

그 이후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하버드 출신의 대학동료들이 좋은 직업을 찾아 돈버는 일을 시도했을 때, 그는 남들이 가는 길을 거부하고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지키겠다고 결심을 한다.


돈이 필요할 때는 보트를 만들거나 담장을 쌓거나 측량을 하는 등 그때마다 자기에게 알맞는 노동을 해서 벌었으므로 그는 결코 게으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직업교육도 받지 않았고, 결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았으며, 교회에 나간 적도 없었다.

육식을 하지 않았으며 술 담배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스스로 사상과 자연의 학생이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미국문학과 사상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현대의 생태학적 자연사상도 그의 영향이 크다.

소로우는 여가가 사업만큼이나 중요한 것이고, 부자가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거의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즉 사람이 부자냐 아니냐는 그의 소유물이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 없이 지내도 되는 물건이 많으냐 적으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그는 소유를 극도로 제한했지만 초라한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세련된 정장, 교양 있는 사람들의 몸짓과 말투 등을 모두 벗어 던져버렸다.

그는 선량한 인디언들을 좋아했다.


소로우는 인간의 양심에 따른 도덕법칙을 강조하고 글과 강연을 통해 노예제도 폐지운동에 헌신하면서 인권과 개혁사상을 줄기차게 역설했다.


이와 같은 그의 사상은 톨스토이,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2차대전후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젊은이들 사이에 그의 저서 <월든>이 성서처럼 널리 읽혔다는 사실은 그의 현존을 말해주고 있다.

그의 글과 주장은 지금도 정신세계에 널리 빛을 발하고 있다.


월든 호수를 처음 본 사람은 글을 통해서 상상했던 것보다 호수가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들은 흔히 크고 작은 것을 밖에 드러난 외면적인 것만으로 판단해왔기 때문이다. 월든은 둘레가 3km도 채 안 되는 규모다.


그러나 진정으로 큰 것은 밖에 드러나 있지 않고 그 내면에 있다. 월든이 수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그 흡인력을 생각한다면 그 어떤 호수보다도 크고 깊다.

한해에 60만명의 정신적인 ‘순례자’(관광객이 아니다)들이 세계 각처에서 이 월든을 찾는 것을 보아도 그 넓이와 깊이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뉴욕에서 일을 마치고 월든을 다시 찾아갔다. 이번이 세 번째인데도 새롭게 느껴졌다.

그 날은 마침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이 한 교사의 인솔하에 소로우의 오두막 터에 와서 현장학습을 하는 광경과 마주쳐 적지 않은 감명을 받았다.


듣는 학생이나 가르치는 선생님의 진지한 그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마치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나오는 존 키팅 선생을 연상케 했다.


학생들의 표정이 하나같이 밝고 여유 있는 것을 보면서, 입시지옥에서 잔뜩 주눅들고 굳어있는 우리 나라 고등학생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만약 우리 고등학교에서 교실밖에 나가 이런 현장학습을 한다면 모르긴 해도 단박 학부모들의 항의가 거셀 것이다.

우리는 교실에만 갇혀서, ‘그곳을 알기 위해서는 그곳에 가야 하는 것’이 진정한 학습임을 모르고 있다.


마침 녹화를 위해 방송사 촬영팀과 동행한 길이라, 그 현장학습의 장면을 담고 싶었다.

선생님에게 한국에서 왔다고 인사를 드리고 학습장면을 좀 찍을 수 있었으면 하고 여쭈었더니 먼저 학생들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다들 찬성하여 순조롭게 찍을 수 있었다.

이런 일 또한 민주적인 교육임을 실감케 했다.


교사가 임의로 결정하지 않고 먼저 학생들의 의사를 물어 결정하는 그 절차가 참으로 믿음직했다.

강의가 끝난후 학생들이 선생님한테서 받아든 종이를 갖고 뿔뿔이 호숫가에 앉아 그 날 학습의 감상문을 쓰는 모습 또한 아름다웠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스무 살이 된 소로우는 그의 가장 짧고도 유명한 교사일을 시작한다.

그의 고향 콩코드 제일의 대학준비학교였다.

교단에 선지 며칠 안되어 ‘3인 학교위원회’의 한 사람이 그를 불렀다.


그는 교실의 활동과 소음수준이 너무 높다고 하면서 아이들에게 처벌을 자주 가할 것을 지시했다.

그의 지시에 자극 받아 소로우는 할 수 없이 매를 들었는데, 그날 저녁으로 그는 사직서를 제출하고 교사직을 그만 두었다.


오늘날 우리들은 자신을 좁은 틀 속에 가두고 서로 닮으려고만 한다.

어째서 따로따로 떨어져 자기자신다운 삶을 살려고 하지 않는가.


각자 스스로 한 사람의 당당한 인간이 될 수는 없는가.

저마다 최선의 장소는 현재 자신이 처해있는 바로 그 자리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