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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3-04-04

    "맑고 향기롭게" 10년을 돌아보며 - 法頂

본문

"맑고 향기롭게" 10년을 돌아보며


法頂(회주스님)


세월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이라는 말에 실감이 갑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모임이 어느새 10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세상은 많이 바뀌었습니다.


21세기에 들어선 세상은 산업사회에서 정보화 사회로 어지럽게 변하고 있습니다.

거리가 단축되고 시간이 팽창되어 앉은 자리에서 세상의 움직임을 한 눈으로 훤히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자리는 날로 위태로워 갑니다. 경제와 개발 논리에 짓눌려 생물의 삶터인 생태계가 말할 수 없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한 해에 수백 종의 생물들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 가고 있답니다.

봄이 와도 철새인 제비가 이 땅에 찾아오지 않는 그런 환경이 되었습니다.

다른 생물에게 일어난 일은 곧 우리 인간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서로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날로 혼탁하고 삭막하고 살벌해 가는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하면 인간의 본래 청정한 심성을 지켜나갈 수 있을까 하는 자각에서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의 모임이 싹텄습니다.


맑음은 개인의 청정을 뜻하고 향기로움은 그 청정의 사회적인 메아리입니다.

베푼다는 말에 저는 저항을 느낍니다. 베푼다는 말에는 수직적인 주종관계가 끼어 듭니다.

시혜자와 수혜자, 곧 은혜를 베푸는 사람과 그 은혜를 받는 사람이 설정됩니다.

진정한 은혜는 수직적이지 않고 수평적이어야 합니다.


자기 것이 있어야 베풀 수 있는데 본질적으로 자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에 올 때 우리는 빈손으로 왔습니다.

갈 때 또한 빈손으로 갑니다. 다만 평소에 익히고 쌓은 업(業)만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릅니다. 현재의 소유는 한 때 맡아서 관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베푼다는 말은 당치 않습니다.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을 필요로 하는 이웃과 나눔입니다.

베품은 수직적이지만 나눔은 수평적입니다.

나눔으로써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사실 개인의 존재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환경과 상황에 한정된 국지적인 존재입니다.

이와 같은 개인이 나눔을 통해서 그 존재의미가 밖으로 확산됩니다.

이웃과 나눔으로써 자신을 보다 깊고 넓은 세계로 이끌어갑니다.

자신을 심화시키고 확장시키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으로서 성숙해집니다.


나무와 돌, 흙과 시멘트, 유리와 쇠붙이 같은 것들은 한낱 자재(건축자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 자재가 어떤 건축물에 쓰일 때 자재는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습니다.

개인의 존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기쁜 일이나 어려운 일을 이웃과 함께 나누어 가짐으로써 보다 성숙한 인간이 됩니다.

국지적인 개인이 전체적인 인간으로 바뀝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이 일에는 낱낱이 그 이름을 들출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의 맑고 향기로운 뜻이 결집되어 있습니다.

어려운 여건 아래에서도 거르지 않고 꼬박꼬박 다달이 성금을 보내주시는 분들, 결식 이웃을 위해 집안일을 제쳐 두고 매주 밑반찬을 마련해 주시는 자원봉사 회원들, 그리고 각 지역모임에서 사재를 들여가며 어려운 이웃을 꾸준히 보살펴 오시는 분들.


이 밖에도 드러나지 않게 돕는 자비의 손길들, 특히 중앙모임에서 10년을 하루 같이 애써 준 문수행 김자경 실장의 헌신적인 노고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과 치하를 드립니다.


사실 지금의 길상사가 생기게 된 것도 맑고 향기롭게의 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귀찮은 일에 얽혀들기 싫어 절을 만들자는 시주의 뜻에 몇 해를 두고 사양해 왔었습니다.

전에는 종로에 사무실을 빌려서 일을 해왔는데, 이 일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구체적인 도량이 있어야 되겠기에 주위의 권유를 받아들여 절을 만들게 된 것입니다.

이 일에는 길상사 초대 주지를 지낸 청학스님과 길상회 회원들, 현재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의 이사와 감사 여러 분들의 숨은 공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이 일을 뒷바라지하면서 문득문득 ‘내 자신은 과연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고 있는가?’하고 스스로 묻습니다.

이 물음을 화두처럼 여기고 있습니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마침내 온 법계가 청정해진다’는 이 가르침을 제 스스로 실현하기 위해 발원합니다.

또 아침마다 기도 끝에 이와 같이 축원합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이 일에 동참한 분들이 저마다 맑고 향기로운 나날을 이루게 하소서.

그리고 이 일을 추진하는 사람들과 자원봉사자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는 일마다 장애 없이 맑고 향기롭게 회향하게 하소서.’


이 글을 읽으실 여러 분들은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를 통해서 만난 이 시대의 인연 있는 가까운 이웃입니다.

열 돌을 맞는 이 시점에서 새롭게 뜻을 다져 우리들 마음과 세상과 자연이 보다 맑고 향기롭게 되도록 우리 함께 꾸준히 정진하십시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봄, 맞이하십시오.


<마음에 피는 연꽃 8면-9면>

맑고향기롭게 설립 취지를 다시 생각하며....


-편집자 주-

아래 글은 맑고향기롭게 창립 취지문으로서 지난 3월16일 길상사에서 맑고향기롭게 창립10주년 기념 행사 때 자료집에 실려 있던 글입니다.


창립 10주년을 맞이했고 대구모임은 7주년이 되었지만 창립 기념행사를 맞아 우리의 첫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다시 한 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 아래 글을 싣습니다.


연꽃은 마른땅에서 피지 않고 진흙탕에서 핍니다.

그러면서도 그 진흙탕에 물들지 않고 둘레를 맑고 향기롭게 비춥니다.

흐리고 시끄러운 세상에 살면서도 거기에 오염되지 않는 청정한 우리 심성을 이 연꽃에 견주기도 합니다.


날이 갈수록 혼탁하고 삭막하고 살벌해져 가는 우리 사회에 맑고 향기로운 마음의 연꽃을 피워보자는 뜻에서 '맑고 향기로운 모임'을 결성 하였습니다.


우리 마음과 세상과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가꾸며 살자는 데에는 너와 내가 있을 수 없습니다.

뜻을 같이 하는 이라면 누구라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가 함께 해야 할 일입니다.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세상이, 나아가서는 온 우주법계가 두루 청정해진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각자의 마음부터 맑고 향기롭게 가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 첫 노력은 욕심을 줄이고, 만족하며 사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행복한 삶을 바라는 것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실제 행복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현재에 만족할 줄 모르고 자꾸만 욕심을 내다보니 행복은 저 멀리 있는 것으로 여겨질 뿐이라는 사실을 바로 알고자 힘쓰겠습니다.


마음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 우리는 또 화내기보다는 늘 웃으며 살 것입니다.

한번 화내면 그만큼 주름살이 늘 뿐이지만 한번 웃으면 그만큼 젊어진다 했습니다.

힘든 때일수록 웃음으로 이겨내며 살아가고자 애쓸 것입니다.

살아가는 데에도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과 함께 하고자 마음을 쓰겠습니다.


우리 마음가짐이 달라지면 그 여파가 곧 세상으로 미칩니다.

나가 아닌 너를 앞세우는 마음으로, 너와 함께 하려는 마음으로 서로 나누어주며 살겠습니다.

제물 뿐 아니라 마음을 나눌 것입니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서부터 서로서로 양보하면서 살겠습니다.

또한 기쁜 마음으로 내가 먼저 남을 칭찬하며 사는 법을 터득토록 하겠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지혜는 뭇 중생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천하미물의 친구로서 함께 살아가는 도리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하늘이, 나무가, 새 한 마리가 복된 삶을 살 수 있을 때 우리 인간도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해 갈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우리 것을 더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내 삶의 터가 궁색할 지라도 꽃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가꾸면서 살겠습니다.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만 취할 것이며 덜 쓰고 덜 버리는 생활을 영위해 가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머리나 가슴만이 아닌 손으로, 발로 실천해 갈 것입니다.

외로움에, 고달픔에 지친 이웃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맞잡을 것입니다.

내 가진 것 비록 적지만 서로 나눠 가지면서 용기를 주고자 함쓸 것입니다.

휴지 한 장이라도 함부로 뽑아 쓰지 않을 것이며, 누군가에 의해 꺽인 나뭇가지는 다시 세워 푸른 강산을 일구는데 앞장서겠습니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백 마디의 진리를 설한 경구를 달달 외우는 것보다 단 한 마디 경구일지라도 아는 대로 실천하는 것이 참답게 아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 가르침을 거울 삼아 자신과 세상과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본 모습 그대로 되찾는 일에 순수한 시민의 뜻과 마음으로 일해갈 것을 천명하는 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