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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3-07-10

    태풍 속에서 - 1

본문

해마다 한두 차례씩 겪는 일이지만


며칠 전 태풍 '베라'가 지나갈 때에도


비슷한 생각을 하지 되풀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농경지나 가옥의 침수와 매몰이며


막대한 재산피해를 가져오는 그런 태풍이,


우리들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산에 살면서 번번이 겪은 내 경험에 따르면,


큰 비바람이 휘몰아치려고 할 때는 반드시 미리 보이는 조짐이 있다.


이번에도 태풍이 오기 2,3일 전에,


하늘이 마치 비로 쓸어놓은 것 같은 그런 구름이 연하게 깔리었고


개미떼들의 큰 이동이 있었다.


그리고 태풍이 있는 날 아침 정랑(변소)에 가니


전에 없이 박쥐가 낮게 매달려 있었다.


이렇게 되면 기상대의 예보를 들을 것도 없이 어김없이 태풍이 온다.


그날 오전 9시 부터 오후 4시께까지 거센 비바람이 산을 휩쓸었다.


용마루의 기왓장이 떨어져내리고, 뜰에 무성하던 파초가 갈기갈기 찢기고꺾이었다.


여기서 우지끈 저기서 우지끈 나뭇가지 부러지고 뿌리째 뽑혀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뜰 앞에 서 있던 장명등꼭지가 어느새 떨어져 나가고,


나무 벼늘에 끈으로 매어 덮어둔 비닐 우장이 펄럭이다가 뒤꼍 나뭇가지에 걸려 요란한 소리를 낸다.


뒷마루에 놓아둔 신문지 상자가 날려 여기저기 어지럽게 물먹은 종이가 널리었다.


대숲은 머릴르 풀어 산발한 채 온몸을 떨면서 거센 비바람에 소용돌이치며 휩쓸렸다.


떨어진 나뭇잎에 수채가 막혀 물이 넘치는 걸 보고 뛰어나갔다가 우산도 날려버리고 흠뻑 젖은 채 들어왔다.


이렇게 되면 속수무책.


거센 자연의 위력 앞에서 사람은 너무도 무력하다.


자연이 크게 진노하여 우리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이 든다.


내 안에서도 거센 바람이 일렁이려고 했다.


공연히 화가 치미는 것이다.


옛날에 본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나온 영화인데,


말짱하던 사람이 아라비아 해 쪽에서 바람이 불어오면 거칠어져서


자기 아내에게 곧잘 손찌검을 하였다.


바람이란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만드는 모양이다.


이런 때는 생각을 크게 돌이켜야 한다.


내가 화를 내면 내 자신이 안팎으로 피해를 입게 되니까.


시작이 있는 것은 그 끝이 있게 마련,


태풍도 불만큼 불다가 잦아질 때가 있으리라.


그렇다.


이런 날이야말로 순수한 '내 날'이 될 수 있다.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다.


불쑥불쑥 찾아드는 불청객들도 이런 날은 어쩔 수 없으리라.


젖은 겉옷을 벗어버리고 속옷 바람으로 홀가분하게 있자.


전기도 나가버렸다.


밖에서는 여전히 거센 비바람.


자, 뭘 하지?


그렇다, 소설이나 읽자.


이런 날은 소설이나 읽어야지 엄숙한 일은 격에도 맞지 않고 어울리지도 않는다.


다락에 올라가 더듬더듬 손에 잡히는 책을 뽑아드니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