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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3-07-16

    그런 날 그런 생각 - 法頂

본문

산방한담 - 그런 날 그런 생각

法頂(회주스님)


1.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끝없이 형성되어 가는 그 과정에 있다. 좋은 일만이 사람을 형성시키는 것은 아니다. 좌절과 실패와 절망을 통해서도 사람은 얼마든지 새롭게 형성된다.

세상에 새것이 어디 있는가.

이미 있었던 것들의 변형일 뿐. 처녀 총각이라 할지라도 몇 생을 살아오는 동안 그들은 닳아질 만큼 닳아진 존재들이다. 다만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로운 만남이 있을 뿐이다.

이미 지나간 과거사(전생일)에 얽매어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한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좋은 일을 생각하고 말하면 그 날은 좋은 날이다. 불쾌한 일을 생각하고 말하면 그 날은 나쁜 날이다. 그러니 좋은 날과 나쁜 날은 오로지 내 생각과 말에 달린 것. 날마다 좋은 날을 이루라.


2.

일 없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가는 곳마다 그 곳 나름의 일거리가 있다. 그 일이 곧 내 삶의 몫이다.

일을 머리 무거워하지 말라. 그 일을 하면서 그 날 하루를 그렇게 사는 것이다.

할 일이 없는 사람을 실업자라고 한다. 그러나 인생에 실업이란 없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항상 일거리가 일손을 기다리고 있다. 일거리마저 없다면 그의 인생은 이미 끝난 것. 이를 일러 죽음이라고 한다.


3.

잠자는 시간을 줄이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다. 시간의 잔고는 아무도 모른다. '‘쇠털 같이 많은 날’ 어쩌고 하는 것은 귀중한 시간에 대한 모독이요, 망언이다.

시간은 오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 한 번 지나가면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잠자는 시간은 휴식이요, 망각이지만 그 한도를 넘으면 죽어 있는 시간이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긴 잠의 시간이 주어질 때가 온다. 살만큼 살다가 숨이 멎으면 검은 의식을 치르면서 ‘고이 잠드소서’'라는 말을 듣는다. 잠은 그때 가서 실컷 잘 수 있으니 깨어 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 한다.

깨어 있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은 그의 인생이 그만큼 많은 삶을 누릴 수 있다.

자다가 깨면 다시 잠들려고 하지 말라. 깨어 있는 그 상태를 즐기라. 보다 값있는 시간으로 활용하라.


4.

수행자는 세상일에 너무 시시콜콜 상관하지 말라. 그것은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의 몫이고 관심사이다. 정치건 경제건 또는 문화건 간에 세상 사람들끼리 알아서 할테니 수행자는 수행에만 전념하라. 수행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수행자의 몫이니까.

수행자가 자신의 본분을 잊은 채 세속사에 지나치게 참견하는 것은 천박하다.

옛 수행자도 이와 같이 읊었다.


옳거니 그르거니 내 몰라라

산이건 물이건 그대로 두라

굳이 서쪽에만 극락세계일까

흰 구름 걷히면 청산인 것을.


5.

음식은 자신이 소화시킬 만큼만 먹어야 한다. 그 이상의 것은 탐욕이다. 평생 이 몸을 위해서 수고해 주는 소화기를 혹사시키지 말라. 실컷 먹고 소화제까지 털어먹는 생물이 우리 인종 말고 또 어디 있는가. 소화기 질환이 일반 동물에게는 없다.

어디 음식만이겠는가. 지식과 정보도 마찬가지다. 어느 수준을 넘으면 그것은 독이 된다. 지식과 정보가 감당할 만한 양을 넘으면 사람이 그 노예가 된다. 아는 것이 도리어 병이 된다는 옛말도 있지 않던가.

사람이,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지식과 정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면 마음 편할 날이 없을 것이다. 불안한 마음은 또 다른 불안을 낳는다.

아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6.

사랑에 침묵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마침내 빈 껍데기로 쳐지고 말 것이다. 사랑은 침묵 속에서 여물어간다. 그 대상이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간에 침묵 속에 떠오르는 그 모습을 기억하라.

침묵은 세월의 체다. 침묵 속에서 걸러지고 남은 알맹이만이 진짜다. 한때 들뜬 마음으로 좋아했던 사람이나 물건도 세월이, 저 침묵의 세월이 흐르고 나면 알맹이와 껍질이 저절로 가려진다.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말이 필요치 않다. 눈빛만 보아도 그 마음을 알아차린다. 침묵 속에서 마주 바라보고, 서로 귀 기울이고, 함께 느끼면서 존재의 잔잔한 기쁨을 나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는 마음에 따로 담아 두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 마음은 비어 있어야 한다. 텅 비워야 그 안에서 울리는 메아리를 함께 들을 수 있다.

마음은 차곡차곡 채우는 것이 아니라 텅텅 비워야 한다.


7.

아까부터 방안에 파리가 몇 마리 날아와 글 쓰는 일에 참견을 한다. 그전 같으면 문을 열고 날려 보내거나 말을 안 들으면 죽비로 휘저어 혼을 내는데, 요즘에는 내 생각이 달라졌다. 이제사 나도 철이 드는가.

한 산중에 사는 이웃이니 어지간하면(크게 방해되지 않는다면) 함께 살기로 했다. 파리를 확대경으로 비쳐보면 ‘살려주세요’Q라고 앞발로 싹싹 빌고 있는 모습이다. 모처럼 찾아온 이웃을 푸대접하거나 때려서 잡는다면, 그것은 이웃의 도리가 아니고 수행자의 도리도 아니다. 자연이란 수많은 이웃들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세계다.

자비심이란 무엇인가. 이웃으로 향한 따뜻한 그 마음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