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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03-08-26

    고마운 우리 산천의 물 - 法頂

본문

고마운 우리 산천의 물


산에 들어와 살면서도 물에 대한 고마움을 모르고 지냈는데, 이 산중 개울가에 살면서부터 물의 은혜를 시시로 느낀다.

물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우리 처지인데도 그 고마움을 잊은 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들 있다.

무심히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맡기고 있으면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헤아리게 된다.

흐르는 물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이야말로 삶의 본질이 아닐까 싶다.

물은 단순히 수소와 산소의 화합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체다.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은 바로 이 물에서 생명을 이어받아 태어난다. 그러기 때문에 물이 없으면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산업사회 이전에는 흐르는 시냇물이나 우물물을 어디서나 마음 놓고 떠 마실 수 있었다. 따로 돈을 내고 사먹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 물이 지금은 다 어떻게 되었는가.

우리들 자신이 망쳐 놓아 함부로 마실 수 없는 물이 된 것이다.

이 산중에 들어와 살면서 나는 무엇보다도 우리 산천이 지닌 시원하고 단 물의 은혜에 고마워하고 있다.

다행히 '하늘 아래 첫 집'이라 상류로부터 어떤 오염도 입지 않고 있다.

그리고 물은 마시는 데 그치지 않고 흐르는 소리에도 그 은혜가 들어 있다.

무더운 여름날 개울가에 앉아 있으면 물소리가 더위를 식혀준다.

한 겨울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는 오히려 듣는 가슴을 따뜻하게 해 준다.

생각이 산만할 때 개울가에 앉아 있으면 맑은 정신이 되돌아온다.


어쩌다 외국에 나가 있을 때 가장 아쉬운 것은 우리 산천의 냉수다.

그리고 번번이 겪는 일인데 우리 산천의 물이 아니면 아무리 좋은 차도 제 맛이 안 난다.

차는 좋은 물을 만나야 그 차가 지닌 향기와 맛과 빛을 제대로 낼 수 있다.

석회가 섞인 물로는 차의 진미와 진향과 진색이 우러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어찌 차에만 국한될 것인가. 우리 인간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친구나 짝을 만나야 그 사람이 지닌 좋은 성품이 드러난다.

친구와 짝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면 삶의 향기와 맛과 빛을 펼쳐보지 못하고 한과 상처만 남는다.

좋은 친구와 짝은 어디서 오는가?

유유상종, 끼리끼리 어울린다.

짝은 내 부름에 대한 응답이므로 좋은 짝을 만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이 좋은 짝이 되도록 준비를 해야 한다.

정제된 차 안에 비장된 향기와 맛과 빛을 우려내려면 좋은 물을 빌어야 하듯이 내 자신이 좋은 물이 되어야 한다.


말이 나온 김에 더위도 식힐 겸 물에 대한 일화를 하나 소개해야겠다.

중국 당나라 때 강주(江州)의 자사를 지낸 장우신(張又新)의 「전다수기(煎茶水記)」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이계경이 호주(湖州)의 지사로 부임하던 도중 유양이란 곳에 이르러 차의 성인으로 일컬어진 육우(陸羽)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는 평소부터 육우의 인품을 익히 알고 있던 터라 수레를 가까이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런 인연으로 함께 호주로 가다가 양자역에서 묵게 된다.

이 때 이계경이 말했다.

"육처사가 차의 명인임은 천하가 다 아는 바입니다. 이곳 양자강 남령의 물이 뛰어난 절품이 아닙니까. 이제 이 두 가지 절묘함이 천 년 만에 한 번 만났으니 이 좋은 인연을 어찌 헛되이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리하여 시종에게 배를 저어 남령의 물을 길어오도록 했다.

한편 육우는 다기를 펼쳐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물이 당도하자 육우는 표주박으로 그 물을 떠올리면서 혼자서 말하기를,

"강물은 강물인데 남령의 물이 아니라 강기슭의 물 같군."이라고 했다.

그러자 물을 길어왔던 시종이 펄쩍 뛰며 말했다.

"소인이 배를 저어 깊숙이 들어간 것을 본 사람들이 수백 명인데 어찌 감히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육우는 아무 말 없이 다른 그릇에 물을 쏟아 절반쯤 이르자 급히 멈추고, 남은 물을 표주박으로 떠올리면서,

"여기서부터가 남령의 물이니라."고 했다.

이를 지켜본 시종은 크게 놀라 엎드려 사죄했다.

"사실은 소인이 남령으로부터 물을 길어오다가 강기슭에 다달았을 때 배가 흔들리는 바람에 그만 물이 절반이나 엎질러졌습니다.

줄어든 물이 두려워 강기슭의 물을 길어 채웠습니다. 육처사님의 감별력은 참으로 신령스럽습니다. 감히 속일 수가 없습니다."

이 때 그 자리에 있던 이계경과 수 십명의 시종들은 깜짝 놀랐다. 그래서 이계경은 육우에게 다시 말했다.

"이미 이와 같이 뛰어난 감별력을 지니셨으니 지금까지 두루 거쳐 온 곳의 물에 대한 품평을 말씀해 주시지요."

그러자 육우가 말했다.

"초 지방의 물이 제일이고 진(晋) 지방의 물이 최하지요."

이계경은 육우가 가르쳐준 차례를 시종에게 적도록 했다.

"여산 강왕곡의 수렴수가 으뜸이고, 무석현 혜산사의 돌샘물이 둘째이며…"

이와 같이 스무 곳의 물을 차례로 들었는데 맨 끝으로 눈 녹인 물을 지적했다.

장우신은 「전다수기」 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본시 차란 산지에서 달여야 제 맛이 난다. 물과 흙(水土)이 걸맞기 때문인데 그 지역을 떠나면 물의 공은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럴듯한 말이다.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이 연상된다.

우리 산천의 물맛은 어떤 구미 제국의 물맛보다도 뛰어나다.

그것은 우리 산천의 살아있는 기운이기도 하다.

우리 산천의 '물보살'에게 감사를 드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