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 광주 남도예술회관 강연
[속보, 생활/문화] 2003년 09월 28일 (일) 18:36
"현명한 이는 곧장가지 않고 꾸불꾸불 돌아가"
“도착지와 시간을 먼저 생각하면 거기에 갇혀, 가는 길을 즐길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삶은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이 순간입니다. 이 순간을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오랜만에 대중 앞에 섰지만 법정 스님(71)은 전혀 변함이 없었다. 부드러우면서도 상대를 꿰뚫어보는 눈매, 카랑카랑한 음성, 쉽게 본질을 전달하는 법문…. ‘무소유’의 삶은 칠순이라는 물리적 나이도 물리친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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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연] 순리(純理)와 조화(調和)의 삶
- [강연] 업(業)에 대해서
지난 27일 오후 광주 남도예술회관 대강당에서 열린 시민단체 ‘맑고 향기롭게’ 창립 10주년 기념 법정 스님 초청 강연회장. 570여 좌석은 물론 통로와 강단 앞까지 꽉 채운 1000여 청중들은 법정 스님의 이야기에 몰입해 있었다.
스님은 군더더기 없는 쉬운 표현과 착착 감기는 비유로 청중들에게 툭툭 화두를 던져 주었고, 강연 후 돌아가는 청중들의 얼굴엔 맑고 향기로운 기운이 넘쳐 보였다. 희망을 잃어가는 세상, 경제난에 태풍까지 겹쳐 메마르고 거칠어진 민심을 헤아렸기 때문일까, 이날 스님이 청중과 우리 사회를 향해 던진 강연 주제는 ‘업(業)’이었다.
◆‘업(業)’
삶은 하루하루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순간순간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업을 만들어 가는 일입니다. 죽을 때 아무 것도 못 가져 가도 업만은 따라간다고 합니다. 폭력 영화를 많이 보면 폭력적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밭에 그런 씨앗을 키우는 것이지요. 남에게 상처 주면 나에게 돌아옵니다.
정보 사회에서는 자제, 억제가 필요합니다. 뭐든지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업은 내가 지어서 나만 받는 게 아니라 자식까지 파장이 이어집니다. 한 번 만난 사람은 반드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좋은 인연 맺어야 합니다. 되도록 적게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고 먹고 걸쳐야 합니다. 하루 한 가지라도 착한 생각, 착한 일을 하면 성공한 날입니다. 순간순간 내가 나를 만들어갑니다.
◆ 속도
근대 과학의 좌우명은 ‘속도’였습니다. ‘빠르게, 더 빠르게, 좀더 빠르게’. 거기엔 그리움, 아쉬움이 고일 여가가 없습니다. 그리움, 아쉬움은 인간의 향기입니다. 자동차들이 도로를 경주하듯 질주합니다. 그게 죽으러 가는 길이라도 그렇게 경주를 할까요. 성숙엔 시간이 필요합니다. 씨앗이 꽃 피고, 열매 맺기 위해선 사계절이 필요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움켜쥐기보다는 쓰다듬기를, 곧장 달려가기 보다는 구불구불 돌아가기를 좋아합니다. 문명은 직선이고 자연은 곡선입니다. 곡선엔 조화와 균형, 삶의 비밀이 담겨 있습니다. 천천히 돌아가고 쉬기도 하고,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이걸 익히는 게 삶의 기술입니다. 고속도로 달릴 때는 앞만 보게 되지만, 국도나 지방도를 갈 때는 둘레를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 않습니까. 시간을 즐기는 사람은 영혼의 밭을 가는 사람입니다.
◆ 환경
추석 다음날 태풍 때문에 돌 굴러 가는 소리에 잠을 못 잤습니다. 아침에 보니 아궁이에 물이 40㎝나 차올랐습니다. 개울엔 큰 바위 다 굴러가고 새 돌이 와 있고…. 이게 다 지구의 자정운동입니다. 인위적으로 흐름을 막은 것들을 자연이 자신의 힘으로 치우는 것입니다. ‘지구환경위기시계’라는 게 있습니다.
12시가 되면 끝인데, 지금 9시 15분으로 사상 최악이랍니다. 미국식 대량 생산·소비·폐기 생활패턴을 안 바꾸면 지구가 몇 개라도 감당하지 못할 겁니다. 북한산 터널 문제도 그렇습니다. 국립공원을 한 번 파괴하면 전례가 돼 앞으로 국립공원이 남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은 큰 생명체입니다. 몸뚱이와 지체를 토막내면 그 결과는 사람에게도 좋지 않습니다. 경제는 어렵다가도 좋아질 수 있지만 자연은 회복·복원할 길이 없습니다. 앞으로 인류가 기댈 곳은 자연밖에 없습니다.
◆ 요즘 세상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 합니다. 일반 시민들은 선량합니다. 하자는 대로 다 합니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이 선량한 마음에 상처를 줍니다. 사회 정서가 말할 수 없이 거칠게 됐습니다. 해답은 가정입니다. 남 탓하기보다는 가정다운 가정을 만들어 삶의 의미를 순간순간 다져나가야 합니다. 각자가 삶의 터전에서 직분을 다하면 좋은 일, 언짢은 일, 다 소화됩니다. 삶의 지혜와 용기는 모두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 이라크 파병
반대합니다. 우리가 이라크 전쟁에 개입할 이유가 없습니다. 미국은 영국을 제외한 우방들의 반대를 무시하고 침공했습니다. 그런 덫에 걸리면 안 됩니다. 국익, 국익 하는데 무엇이 진정한 국익인지 잘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 강원도 생활
‘거지도 제 멋에 산다’고, 강원도로 옮겨온 지 한 10여년 됐습니다.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입니다. 처음엔 불편했는데, 전기 들어오면 냉장고, TV도 들어올 것이고 그러면 온갖 세상 이야기, 기계에서 나는 잡소리 다 듣고 살아야 하지 않습니까. 라디오를 듣는데 기상예보 듣고 끕니다. 정치인들 얼마 먹었네 하는 이야기 들으면서 그런 상처까지 산 속에 불러들이기 싫습니다. 중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남도 바람은 산자락 돌아 몸에 휘감기지만 강원도 바람은 내리꽂히는 바람이라, 가끔 아궁이 불 붙이다가 깜짝 놀라 아궁이에 대고 욕도 퍼붓지요. 욕설도 적당하면 스트레스 해소되고, 혼자하는 것은 노래도 됩니다.
오염되지 않은 물 많이 마시고, 많이 걷습니다. 혼자서 변변찮은 푸성귀 먹고 살지만 우주의 에너지를 받아선지 좋습니다. ‘늙은 중이 언제까지 거기 살거냐’ 하는데, 언제까지가 아니고 그냥 하루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나답게, 최선을 다해서.
법정 스님의 강연은 10월 1일 오후3시 창원 KBS홀, 10월 2일 오후 1시 부산 롯데호텔 3층, 10월 4일 오후 2시 경북대 대강당으로 이어진다. (02)741-4696~7
(광주=김한수기자 hansu@chosun.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