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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 08-12-24

    '단동십훈'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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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소식지에 실린 '단동십훈'에 대한 기사를 보고 몇자 적고자 한다.

단동십훈은 원래 고조선 때부터 내려오는 우리 고유의 육아법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모 드라마에서나 신문지상에 한자 어원으로 쓰고 해석해 놓은 글이 많아 오해의 소지가 높다. 나 역시 전문가가 아니기에 도움될만한 자료를 찾아 보았다. 그러던 중 단국대의 안희진 교수님이 한겨레신문에 반론한 글이 있어 그대로 발췌해 올려본다.


"한자에 우리 영혼 우겨 넣은 단동십훈" 안희진/단국대 중국어과 교수


해방 이후 파행을 겪어온 한자교육의 부작용이 이렇게 나타날 줄은 몰랐다. 중앙지의 주요 논설위원이 이른바 ‘단동십훈’이라는 걸 어디서 듣고 10월4일치 칼럼을 실었는데, 읽는 순간 그야말로 아이쿠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건 아니다. “곤지곤지, 도리도리, 짝짜꿍, 까꿍” 등 아이들의 육아 과정에서 자연스레 형성된 우리말이 그렇게 깊은 의미를 감춘 한자 문구라고 하니 억지를 부려도 그렇게 억지를 부리면 안 된다. 그건 과거에 한자가 주요 문자였던 시절, 순수 우리말을 유사한 발음이 나는 한자로 음역해서 기록한 자료일 뿐이다. 또 그 이론은 일부 한자적 사고를 즐기는 사람들이 꾸며낸 재미난 길거리 얘기다. 길거리 얘기야 삼류 잡지 등이 재미를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주요 일간지의 주요 논설위원이 그런 도청도설로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전하는 것처럼 지면을 채우다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근래 들어 이런 이야기가 도는 것은 일부 국수주의적인 신흥 단체나 자생 종교 내부에서 그럴싸하게 살을 붙여 전파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래 하나의 민족문화는 다양한 외부 문화와의 교류 속에 변화와 발전을 하게 마련이다. 한자문명이 절대적이었던 19세기가 물러간 지 백년이 된 지금 한자에 대한 무지와 미신은 여전히 신비감을 갖춘 채 우리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한자는 그저 한 개의 언어를 표기하는 문자이다. 우리는 그것을 오랫동안 차용해 왔을 뿐이다. 그런데 그런 한자에 우리의 영혼을 오히려 구겨 넣고 틀에 맞추려는 이런 종류의 말은, 옛것이라면 그저 무조건적으로 대단하게 보는 낡은 사고가 작용한 결과이다. 이런 허무맹랑한 요언이 사람들에게 그럴싸하게 들리는 까닭은 우리 문화 속에서 한자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정리되지 않았기 때문이고, 또한 그것은 한자교육을 오랫동안 멀리해온 거스름 작용이기도 하다.


한자 감상주의자들은 순수한 우리말에 한자를 집어넣음으로써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예를 들면 닭이 우는 소리가 “꼬끼요∼” 하는 것도 “곡기요”(穀氣要), 헛기침 소리 “어험∼”도 “어험”(語驗)이라고 하는 식이다. 고유한 우리말이지만 불가피하게 한자로 표기하는 음역의 필요가 있을 때나, 한자로 문자 유희를 할 때 하는 이런 투의 말이 점차 머리와 꼬리를 갖추고 앞뒤가 그럴싸하게 갖춰지면 한자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믿을 수밖에 없는 신비한 학설일 뿐이다.


그런 것을 무슨 대단히 심오한 이론이 깔려 있는 양 확대재생산하는 것은 상식을 갖춘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




안희진/단국대 중국어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