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맑고 아름다웠다. 지난 26일(수) 하루 휴가를 내어 태안 원유유출 사고 현장에 가서 자원봉사활동을 하고 왔다. 사고 이후 피해상황과 자원봉사자들의 활동을 TV로만 보아오다가 맑고본부에서 자원활동 자리를 만들어 주어 동참할 수 있었다. 연말을 맞아 참 뜻 깊게 보낸 하루였다. 겨울날씨답지 않게 포근한 날씨 덕분에 두껍게 껴 입은 내의와 곁옷이 작업하는데 오히려 부담스러우리만큼 날씨 또한 너무 맑고 포근했다. 전날 저녁에 소풍가는 어린아이 마냥 들뜬 기분으로 베낭에 고무장갑, 목장갑, 수건과 낡은 내의와 와이셔츠 5개를 챙겨 넣고는 작업 때 입을 옷까지 준비해 두었다. 늘상 일어나는 그 시간이지만 행여 늦을까 알람시계를 두 번 세 번 맞추고 늦잠 자지 않기를 바라며 잠자리에 들었다. 매일 아침 한 시간씩 하던 염불공부도 이날만은 그만두었다. 놀러 가는 것도 아닌데 세수를 하고 옷 입는데 가슴이 설레었다. 출발시간에 늦을까 이제 막 뜸이 든 아침 밥을 퍼서 후-후- 불며 챙겨먹고는 허겁지겁 집을 나서니 아직도 어두운 새벽길이다. 이렇게 이른새벽 지하철을 타보는 것도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벌써 많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잠이 부족했던지 하나같이 눈을 감고 있다. 빈자리를 찾아 앉으며 맞은 편에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사람들 얼굴을 한 사람 한 사람 살펴보았다. 머리 손질을 하지 않았는지 아무렇게나 헝클어진 나이 지근한 어른, 모자를 꾹 눌러쓰고 고개숙인 젊은이, 예쁘게 단장한 얼굴을 꼿꼿이 세우고 있는 아가씨, 가방 하나 옆에 끼고 비스듬히 고개숙인 중년 아줌마... 가방에서 책을 꺼내 펼쳐 읽었다. 앞에 앉은 사람들 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누군가 모자 쓰고 베낭가방을 멘 나의 모습을 보고는 젊은 사람이 취직도 못해 이 꼭두새벽부터 어느 산에 가려고 나섰나 이런 생각을 할까봐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책을 반 장도 채 읽기 전에 벌써 목적지인 한성대역에 도착했다. 출구를 나서니 참가자를 길상사까지 태워줄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몇 몇 낯익은 분이 보였다. 길상사에 도착하니 참가자들을 태워갈 대형버스 두 대가 기다리고 있다. 실장님과 간사님들 만나 반갑게 인사 나누고 지정된 버스에 오르니 맑고향기롭게 본부 간사들께서 좌석마다 작업 때 사용할 장화와 방진복을 미리 하나씩 준비해 두었다. 준비한 것을 보니 간사들께서 고생 많이 한 것 같다. 아침 7시. 길상사 주지스님의 환송을 받으며 자원활동 참가자를 실은 차는 태안을 향해 출발하였다. 아침식사를 못한 분들을 위해 김밥을 하나씩 나누어 주길래 난 아침을 간단히 먹었으면서도 욕심에 받아 먹었다. 김밥을 정성들여 싼 듯 참 맛있다. 태안으로 가는 길에 잠시 서해대교 행담휴게소에 들렀다. 주차장에는 수 많은 버스들이 주차해 있다. 모두 태안으로 기름제거 하러 가는 봉사자들을 태운 버스 같았다. 역시 해안에 도착해 보니 2차선 도로를 따라 수 많은 버스들이 줄지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출근길과 겹쳐 도로가 밀려 태안에는 생각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여 작업할 해안에 도착하니 벌써 10시 30분이나 되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태안군 소원면 소근리 해안 맨 안쪽이다. 이 해안은 석축과 해안 암반 그리고 약간의 모래톱과 돌들이 있는 곳이다. 바닷물이 빠져 갯벌이 저 멀리까지 펼쳐져 있다. 해안선을 따라 포장된 2차선 지방도로에는 봉사자들을 태워 온 차량들이 수 십 대가 줄지어 서 있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해안선을 따라 길게 늘어서 기름제거 작업을 하고 있었다. 버스에 내리니 생각했던 것보다 기름냄새 별로 나지 않는다. 도로 위에서 물이 빠진 갯벌과 해안선 모래와 돌을 바라보니 TV에서 보듯 그런 기름은 보이지 않았다. 돌들이 조금 검게 보이긴 했으나 냄새도 별로 없고 해서 벌써 기름을 모두 제거했나 생각될 정도였다. 고무장갑을 끼고 가방에 넣어온 낡은 내의와 런닝셔츠를 담은 봉지를 들고 기름제거 작업할 해안가로 내려섰다. 약간의 모래와 돌들이 있는 해안가이다. 갑자기 바람에 기름냄새가 풍겨왔다. 모래가 갈색처럼 보였다. 만져보니 기름을 먹은 모래다. 앞서 다녀간 봉사자들이 기름 묻은 돌을 닦고는 군데군데 모아 두었다. 돌을 하나 들어 살펴보니 검긴 했으나 기름은 거의 없어 보였다. 벌써 다 닦았는데 뭘 닦나하며 이 돌 저 돌 들어 보니 구석진 곳엔 까만 타르가 물방울처럼 묻어 있다. 그제서야 기름 찌꺼기 타르가 묻은 것이 보였다. 런닝셔츠를 꺼내 닦아보니 생각처럼 잘 닦이지 않는다. 타르가 밀리며 돌이 검게 되었다. 있는 힘을 다해 박박 문질러 보았다. 물에 젖은 타르는 그런대로 닦였지만 이미 마른 타르는 닦이지 않는다. 모래와 진흙이 섞인 바닥에 박혀 있는 돌을 하나 빼 보았다. 묻히지 않은 옆 면에는 작은 알갱이 같은 까만 타르가 더덕더덕 붙어 있다. 서서보면 보이지 않던 돌 옆면에 타르가 까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흰 런닝셔츠로 쓱 닦으니 찐득찐득한 타르가 밀리며 닦인다. 한 시간이나 닦았을까 쪼그리고 닦으려니 허리가 아프다. 아예 자리를 잡아 천을 바닥에 깔고 앉았다. 주위의 큰 돌에서 작은 조약돌까지 하나 하나 닦았다. 이런 못생긴 돌을 이렇게 정성스럽게 닦을줄이야. 모두들 한 자리에 앉아 돌을 닦는다. 어떤 분들은 검은 모래를 천으로 빨래빨듯 주물럭거리며 빤다(?) 하얀 천들이 금방 검게 변한다. 맑고 팀과 다른 봉사자들이 한데 어우러져 돌을 닦고 모래를 닦는다. 작업하다가 옆에서 돌을 닦고 있는 빨간 비닐 옷을 입은 아주머니께 어디서 오셨냐고 여쭈니 경북 청도에서 왔다고 한다. 마을에서 차 한 대를 준비하여 새벽 3시에 나섰다는 것이다. 또 노란 비닐 옷을 입고 작업 하시는 아주머니께도 어디서 오셨냐고 여쭈니 충북 옥천에서 왔다고 한다. 모두들 기름에 오염된 뉴스를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해서 오셨다고 했다. 저 멀리 충청도, 경상도 아주머니들이 기름묻은 돌 하나 닦겠다고 새벽같이 달려와 내 일처럼 열심히 닦는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기름 묻은 돌을 닦으며 한결같이 '이를 어째 이를 어째' 하며 안타까워 하시는 말씀을 들을 땐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꼈고,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 달려 왔다는 말씀에 이 태안도 곧 옛날처럼 깨끗하게 돌아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돌에는 이미 타르가 말라 붙어 닦아도 닦이지 않고, 한 번 닦은 돌이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면 햇빛에 덜 닦인 타르가 어디서 스며 나왔는지 물바울처럼 맺혀 있다. 오전 내내 작업을 해도 그 자리에서 맴돌뿐이었다. 오전 작업이 끝나고 맑고본부에서 준비한 점심을 둘러 앉아 먹었다. 처음 도착했을 때보다 더 많은 봉사자들이 해안선을 따라 빨강, 노랑, 흰색, 회색 등 갖가지 작업복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늘어서 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으니 가슴이 뭉클했다. 점심식사가 끝나고 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오전 작업 때와는 달리 봉사자들도 제법 즐거운 마음으로 기름을 닦는다. 멀리서 오신 아주머니들이 기름을 닦고 있는 나를 보더니 젊은 남자라며 나보고 노래를 부르란다. 제법 기분좋게 노래를 부르는데 한 마디 부르고 나니 갑자기 내가 여기 봉사하러 온 것이지 놀러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들어 부르던 노래를 멈추었다. 분위기 파악도 못하고 휩쓸린 것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주머니들은 노래를 멈추자 가사 잊어버렸는가 왜 안 하냐고 난리다. 그냥 웃고 말았다. 가져간 낡은 내의와 런닝셔츠를 모두 사용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오후 3시가 조금 넘어섰을 즈음 빠졌던 바닷물이 슬금슬금 소리없이 물골을 타고 들어오고 있었다. 자리를 옮겨 맑고팀들이 여렷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윤라간사님이 굴껍질이 쌓인 모래를 뒤적이자 그 속에서 유전이라도 생긴 듯 검은 기름이 줄줄 흘러 나왔다. 모래 곁은 멀쩡했는데 파면 팔수록 타르가 가득 담긴 굴껍질과 모래속에서 시커먼 기름이 샘솟듯 흘러 나왔다. 모두들 윤라간사님이 파낸 모래와 굴껍질을 천으로 빨래빨듯 비벼 기름을 빨아 들였다. 이미 작업을 철수한 분들은 도로 위에서 바닷물이 들어오니 모두 작업 중단하고 빨리 정리해서 나오라고 야단이다. 파 놓은 기름덩어리가 물이 들어오면 다시 떠다닐 것 같아 조금이라도 더 닦아 내려고 쉬지않고 걸레질을 했더니 양팔이 뻐지근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기름 묻은 천들을 모두 수거하여 부대에 담아 한쪽으로 모으고 나니 어느새 갯벌도 사라지고 작업했던 모래톱까지 바닷물로 가득 찼다. 실장님이 맑고향기롭게는 5시까지 작업을 하겠다고 했는데 작업할 수 있는 곳은 모두 물로 가득차서 작업할 곳이 없어져 버렸다. 아쉬웠다.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썰물 때 뿐이라 물때를 잘 맞춰야 하는데 썰물 시간에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은 불과 너댓시간도 되지 않는다. 석양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어쩔 수 없이 서울로 돌아와야 하는 맘이 안타까웠지만 기름제거 작업이 하루 이틀만에 끝날 일이 아니라는 것에 시간이 날 때마다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