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07년 11월 15일 7:00 ~ 17:30
장소 강원도 철원군 도피안사, 백마고지
참가자 김석우님 선생님, 한정갑 선생님, 이수진 팀장님,
엄경숙님, 조고희님, 서은영님, 박미호
글/사진 박미호
2008 학년도 수능시험이 치뤄지던 지난 15일 우리는 경복궁역에서 모여 금년의 마지막 탐사를 떠났다. 목적지는 강원도 철원지방으로 도피안사와 철새 도래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새벽녘에 내린 가을비로 땅은 촉촉하게 젖었고 안개가 끼어서 새들을 잘 볼 수 있을런지 걱정이 앞선다.
자유로로 들어서서 김포대교를 건너는데 강가에 쳐진 철조망 위에 앉아있는 황조롱이의 모습이 보인다. 추수가 끝난 부근의 논에 새까맣게 모여앉아 땅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먹고 있다가 무리지어 날아오르는 기러기들도 보인다. 잠시 자유로변에 차를 세우고 새들을
관찰해 보기로 한다.
쌍안경으로는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 않아서 김선생님이 가져오신 고성능 field scope를
통해서 보니 새들의 형태가 또렷하게 드러난다.
물가를 노니는 흰뺨검둥오리, 천둥오리, 비오리들과 더 멀리로는 고개를 움츠린 채 졸고있는 듯한 왜가리 가족의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들 탄성을 터뜨렸다. 아~ 이래서 사람들이 새 보러 쫓아(?) 다니는가 보다.
한참동안 정신이 팔렸다가 강바람이 차고 갈 길이 머니 다시 차에 올랐다.
옆자리의 은영님이 나즈막하게 동요를 읊조린다.
"달~ 밝은 가을 밤에 기러기들이 찬~서리 맞으면서 어디로들 가느냐..."
그런데 선생님 이 가사 내용이 맞는건가요? 하고 김선생님께 여쭈니,
캐나다 기러기의 경우 먼거리를 이동할 때 야간 비행을 하기도 하지만 이때 쯤이면 이미
한반도로 남하해 와 있을 시기이니, 차라리 러시아 지역에서 그렇게 불리워지는 것이
기러기의 생태에 맞는 것이라는 답변을 주신다.
차는 계속해서 오두산 통일전망대, 율곡리, 어유지리, 한탄강 유원지,전곡리 선사유적지,
연천, 그리고 경원선 철도 중단점인 신탄리 등의 이정표를 지나친다.
길은 어느새 자유로가 끝나고 3번 국도로 접어들었다.
이 곳의 은행나무 가로수들은 벌써 옷을 다 벗고 앙상한 가지만을 드러내고 있다.
도로 중간 중간에는 대전차 방어물이 서 있고 길 양 옆으로 쳐진 철조망에는 '지뢰'라는
푯말이 보이니 휴전선 지역에 가까이 온 것을 실감하게 된다.
차가 백마고지전적지에서 멈췄다.
白馬高地는 6.25 한국전쟁의 막바지에 휴전 협상이 진행되는 상태에서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벌이며 적군과 아군 1만3천여 명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다.
지금 이 곳에는 당시에 희생된 국군 898위의 영혼을 진혼하는 위령비와 기념관, 常勝閣등이 건립되어있다. 명칭의 유래는 전쟁 중 포격에 의해수목이 다 쓰러져 버리고난 후의
형상이 누워있는 백마처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후로 전투를 수행한 제9보병사단의 부대 애칭을 백마부대 라고 부르게 되었단다.
위령비 앞에서 잠시 묵념을 하고 기념관을 둘러본 뒤에 백마고지가 바라보이는 곳으로 올라섰다. 한탄강 유역에서 가져온 현무암으로 돌담이 쳐져있고 거기서 부터는 민간인출입통제구역이라는 안내문이 서있다.
마침 훈련소를 갓 수료하고 자대 배치 된 듯한 앳된 얼굴의 이등병들이 견학을 왔다.
두 차례의 남북 정상회담이 이루어지며 남북 교류의 물꼬가 트인 오늘날의 정세에 비추어 보면, 50여년 전 그분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치신 것일까 숙연해졌다.
돌담 아래로 빈 논에는 몇 무리의 두루미와 재두루미 가족들이 있었는데 바로 앞의 키 큰
나무 가지 끝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서 다시 차를 타고 내려가 논 사이를 지나면서 가까이서 보기로 하였다.
김선생님이 새들은 경계심이 있어 차를 멈추면 날아가 버리니까 천천히 지나치면서 보자고 하신다. 지금까지는 망원경을 통해서만 보았지만 바로 10여 미터 앞으로 재두루미들의 모습이 나타났다.
재두루미는 지구상에 5천여 마리 밖에 없는 세계적 보호종이다.
시베리아, 우수리, 몽골, 중국 동북부 등지에서 번식하고 한국, 일본, 중국 동남부 등지에서 겨울을 난다. 1980년대 까지도 한강 하구에서 2천여 마리가 월동했지만, 서식지 파괴로 일본 가고시마 이즈미로 월동지를 옮겨 요즈음은 120여 마리 만이 우리나라를 찾고 있다.
몸 길이 127cm로 풀뿌리와 논에 떨어진 낟알 등 식물성 먹이를 주로 먹지만, 미꾸라지,
다슬기 등 동물성 먹이도 먹는다. 긴 목을 S자 모양으로 굽히고 땅위를 걸어다니면서
먹이를 찾는다. 날아오를 때는 날개를 절반 정도 벌리고 몇 걸음 뛰어가면서 활주한 다음
떠 오른다. 밤에는 흑두루미 처럼 한 쪽 다리로 서서 쉬되 머리를 뒤로 보내 목을 굽혀서
등의 깃 사이에 파묻고 무리를 지어 잔다.
재두루미를 지나치고 나니 다음으로는 두루미 가족이 우리를 반겨준다.
두루미란 이름은 '두룩 두룩' 하고 울어서 붙여졌단다.
예로 부터 신선이 타고 다니는 새로 여겨졌고, 아름다운 것만 취하고 깨끗하다고 해서
기품 있는 선비를 상징했다.
연하장을 부지런히 주고 받던 시절에는 단골 표지모델로 등장했었지만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별 감흥이 없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보니 우아한 자태가 감탄스럽다.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초습지에서 번식하는데 살 곳이 점점 사라져 절종 상태에 처해
있고 국제적으로 보호받고 있다. 전 세계의 두루미는 1천 5백여 개체로 추산되며,
일본 홋카이도에는 6백여 개체가 텃새로 정착돼 있다.
한국에는 예로 부터 10월 하순 부터 수천 마리의 두루미 떼가 찾아와 겨울을 났으나
지금은 경기도 파주의 자유의 마을, 경기도 연천군, 강화도 철원군 주변의 비무장 지대
부근과 인천, 강화 지역의 해안 갯벌에 120~150 마리 씩 찾아와 겨울을 날 뿐이다.
몸 길이 126~140cm, 날개 펼친 길이 240cm, 몸무게 약 10kg 이며, 벼를 주로 먹지만 미꾸라지, 다슬기, 곤충등도 즐겨 먹는다.
사진 오른 편에 고개를 숙인 것이 목덜미가 연한 갈색인 것으로 보아 한 살이 안 된 새끼 새이고 가운데 것은 목덜미가 회색 빛인데, 만 3년이 되면 완전히 검정색이 된다.
2~3월에 구애를 할 때 소위 '학춤', 즉 부리를 하늘로 향하고 암수가 반복해서 마주우는
과시 행동을 한다. 한 배의 산란 수는 1~2개 이며, 암수가 번갈아 가며 알을 품어서
31~34일 만에 부화된다. 새끼는 만 3년이 되어야 번식할 수 있다.
전설로는 천 년을 산다고 하지만, 적어도 200년은 사는 것으로 추정 된다는데,
지금 까지 확인 된 바로는 검은목두루미의 86년이 최고 수명으로 기록되어 있단다.
두루미와 재두루미의 모습에 취해 논 길을 돌아 오니 검문소를 통과하여 나오고 있었다.
원래는 민통선 구역인데 백마고지 전적지에서 슬쩍 뒷길로 빠져 온 것이었다.
보통은 독수리도 있는데, 오늘은 웬일인지 한 마리도 못 보았다고 김선생님이 아쉬워하셨다.
이제 발길을 도피안사로 향하는데, 길 가에 옛 '북한 노동당 철원군 당사'가 뼈대만 남은
채 서 있었다.
1946년에 건립되어 6.25 전쟁 전 까지 사용되던 건물이다.
이 곳이 6.25 전에는 38선 이북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鐵原은 예로부터 이름 그대로 철이 많이 나오는 곳이란다.
그리고 곡창지대로 이름난 드넓은 평야지대이다.
겨울에는 땅 속에서 따뜻한 물이 흘러나와 얼지 않기 때문에 철새들이 물과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추고 있다.
그래서인지 궁예가 여기에 도읍을 정하고 후고구려를 일으킨 곳이기도 하다.
금강산에서 발원한 한탄강은 철원 평야를 휘감아 돌다 임진강으로 합수한다.
한탄강의 본래 이름은 '한여울' 즉 큰 여울이라는 뜻이지만,
궁예가 후삼국간의 다툼 속에서 왕건에게 쫓기어 이 강을 건너면서 눈물어린 한탄을
했다고 해서 恨歎江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한다.
옛 궁예 궁터는 지금은 비무장 지대 속에 갇혀 버려 갈 수가 없다.
도피안사는 철원을 대표하는 사찰로 10여년 전 까지만 해도 민통선 안 쪽 군부대 속에
처량히 남아 있어, 복잡한 절차를 거치고서야 어렵게 드나들 수 있었단다.
조계종 신흥사의 말사로 신라 경문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했다.
8.15 해방 후 공산 치하에 들어갔다가 6.25 전쟁 때 전화로 완전 폐허가 된 것을
1959년 당시 육군 제15사단에서 재건하여 군승을 두어 관리하다가,
1986년 사찰 관리권이 조계종으로 이관되었다.
到彼岸寺 라는 이름은 법당에 있는 철조 비로자나불이 피안 즉 열반의 세계에 이르렀다는
뜻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이 불상은 도선국사가 조성하여 철원의 안양사로 가지고 가던 중에 없어져서 한참을
찾아보니 華開山의 현 위치에 안좌하고 있어서 주변의 신도 천여 명을 동원하여 절을
세웠다고 한다.
현재의 도피안사 대적광전에 있는 비로자나불상과 절 마당의 삼층석탑만이 창건 당시의
것이고, 나머지 전각들은 모두 6.25전쟁 후에 다시 지어진 것이며, 지금도 불사가
이어지고 있다.
한선생님은 '到彼岸' 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하신다.
세속에서 도피한다는 뜻도 아니요, 서방정토인 극락에 도달했다는 뜻도 아니며,
중생계인 남섬부주에서 이제 막 바다를 건너 맞은 편 언덕에 닿았을 뿐, 아직 부처님이
계신 수미산에 올라 열반의 경지에 이른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중생들은 이곳을 수행터로 삼아 성불하기 위해 힘쓰자는 말씀이다.
도피안사의 가람 배치는 도로에서 '피안교'라는 다리를 건너오면 주차장이 있고
그 뒤로 사천왕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는데 아직 금강역사가 모셔지지 않고
공사중인 금강문을 지나서 계단을 올라 느티나무 오른 쪽으로 돌아들어가면
대적광전이 보이게 되어있다.
한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장차 피안교 앞에 일주문을 세워 거기 까지 절의 경내로
끌어들이는 것이 피안으로 건너왔다는 의미에도 합당할 것이란다.
대적광전 앞에는 삼층석탑이 서있다.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그 구조가 특이해서 보통은 4각으 돌을 이용하는데 비해 8각 모양의 돌로
첫번 째 단을 높게 쌓았다. 그 위로는 연화 대좌로 둘째 단을 대신하여
마치 불상의 좌대위에 석탑이 얹혀진 것 처럼 보인다.
지붕들은 다소 무거워 보이긴 하지만 네 귀퉁이가 한껏 위로 들려 있어서 아름답다.
밑면의 받침이 1층은 4단인데 2.3층은 3단으로 일정치가 않아서
전체적인 탑의 양식이 통일 신라에서 고려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모습임을 보여준다.
대적광전 안에는 철조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이 부처님은 9세기 하대 신라를 대표하는 불상으로 일찍이 국보로 지정되었단다.
부처님의 상호는 원만하고 인자하다기 보다는 도전적이고 씩씩하다.
지난 봄 용산 박물관에서 열린 '북한 문화재 전시'에서 본 날씬한 자태의
고려태조 왕건의 조각상과 닮았다. 엇비슷한 시기의 인근 지역 인물이어서일까?
당시의 이 지방 호족들은 부근의 풍부한 철을 재료로 농기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해
보유하고 있던 제철 시설과 기술을 이용하여 그 때 유행하기 시작한 비로자나 신앙을
바탕으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한다.
원래 이 철불은 조개껍데기를 태워서 만든 회분가루를 입혀 차분히 가라앉은 금색을
띠고 있었는데, 80년대에 삐까번쩍 하는 금빛으로 개금되었다가,
논란을 거쳐 다시 지금의 모습으로 되돌려졌다고 한다.
현재 법당 안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지장보살 탱화를 모셔
그 앞에 영가단을 만들고, 왼쪽에는 신중단을 모셨는데
한선생님은 이런 배치는 상단에 부처님과 보살을, 중단에 신중을, 하단에 영가를
모시는 원칙에 어긋난다고 지적하신다.
또 뒤에는 천불을 모시고 있는데, 법신인 비로자나불과 천불이 공존할 수는 없으니
따로 천불전을 지어서 이사를 가셔야 하겠단다.
이제 도피안사는 대강 둘러본 셈이니 탑 앞에서 마지막 기념촬영을 하고
사천왕문을 향해 내려섰다.
오른편에 있는 연못에는 시든 연잎만 을씨년스럽게 떠다니는데
그 연못에 알을 낳고 수명을 다한 고추잠자리의 주검이 시야에 들어온다.
우리 중생들의 일생이라고 저 잠자리들의 일생과 크게 다를 것이 무엇이겠는가?
지난 4월 보은 법주사를 시작으로 영월 법흥사, 영주 부석사, 여주 신륵사,
원주 구룡사, 인제 백담사, 풍기 희방사, 양평 용문사, 오대산 상원사와 월정사,
강화 전등사, 양양 낙산사, 장성 백양사 그리고 이번 철원 도피안사로 이어진
우리들의 식생문화탐사의 여정이 끝났습니다.
그냥 자연과 친해지고 싶어서 절이 좋아서 용기를 내어보았는데
과분한 혜택을 주신 '맑고 향기롭게'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한 해 너무 행복했습니다!
예쁜 우리 이름을 가진 야생화들과 만났습니다.
새 순이 날 때 부터 꽃피우고 열매맺고 단풍을 뽑내다가
내년을 기약하는 눈을 남기고 옷을 벗는 나무의 한 해 살이를 가까이서 지켜보았습니다.
키 작은 나무와 큰 나무들이 함께 하며 건강한 숲을 이루어 가는 숲의 천이 과정을
배웠으며 그 속에서 경쟁하고 또 서로 도와가며 살아가는 곤충들과 새들도 만났습니다.
김선생님이 인간이란 생태계를 좀 먹는 해충에 불과하다는 표현도 하셨지만, 소비자로만 머무르지 않고 관심을 기울이고 지혜를 내어 자연에게 회향하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라는 책임감이 느껴집니다.
이런 우리의 산하에 비교적 가깝게 자리하고 있는 옛 사찰들을 돌아보았지요.
가람배치, 탑, 종, 불전, 불상 등을 공부할때는 용어들도 낯설고, 기억 용량의 한도를 초과하니 힘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절은 자신의 내면을 찾아 수행하여 성불을 하고자 할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을 본질로 삼는것임을 한 선생님이 항상 상기시켜주셨지요.
뒷받침하느라 애써주신 김자경 실장님, 이수진 팀장님 고맙습니다.
열강으로 때로는 재치있는 유머로 새로운 세상에 눈뜨는데 길잡이가 되어주신 김석우 선생님, 한정갑 선생님 고맙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열어주신 동료 회원님들 고맙습니다.
협조해주신 사찰관계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어설픈 내용이나마 저희들이 올린 글에 관심을 가져주신 분들께도 고맙습니다.
* 도피안사에 대한 내용은 유홍준님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참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