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맑고 향기롭게 살기
"무언가 모자라고 아쉬운 여백의 美가 있어야 우리 삶의 숨통이 트인다는 법정스님 가르침으로 자신의 모습을 돌아봐야"
지난 토요일 법정스님의 다비식이 순천 송광사에서 진행되는 동안 기자는 스님이 생전에 설법하던 성북동 길상사를 찾았다. 일주문을 지나 법당과 요사체에 이르는 곳곳에 `묵언`이라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몰려드는 추모객들의 언행이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음인지 풍광 좋은 그곳에서 그리도 재잘거리던 새들조차 소리를 죽여 경내는 숙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분향을 마치고 스님이 산 속 오두막에서 쓴 책 `오두막 편지`를 다시 꺼내들었다.
스님은 이 책에서 "아무것도 없는 빈 방에 있으면 전체적인 자기, 온전한 자기를 찾는다"고 했다. 그리고 "무언가 모자라고 아쉬운 여백의 미가 있어야 우리 삶의 숨통이 트인다"고 했다. 온갖 문명의 이기(利器)가 들어차야 풍족하고 충만한 삶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일침을 가하는 말씀이다.
스님은 가셨지만 그 향내가 은은하게 남은 사람들 가슴에 여운을 드리우고 있다. 듣기 좋은 말, 하기 좋은 말이 난무하지만 제대로 실천되지 않는 사바에서 스님은 대중이 도저히 따라 하기 힘든 생각과 말씀을 몸소 행동으로 옮기며 중생을 계도했다.
그 중심이 무소유 정신이다. 하지만 69억 인간에게 굴레로 씌워진 자본주의 삶의 방식을 우리가 거부하고 살아갈 재간은 없다. 스님처럼 완전한 `버림`을 이행하며 사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무소유 정신을 실천하는 데 새로운 해석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것은 소유의 절제, 과욕 내려놓기, 남의 것 찬탈 안하기 그리고 모든 해악의 근원인 욕망의 정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의 실천을 통해 제가 가진 것을 이웃과 나누는 것이 스님의 정신을 잇는 것이라고 본다.
스님은 사회가 좀 더 푸근해져야 한다고 산 속 오두막에 홀로 살며 늘 말했다. 그가 푸근하지 않다고 여긴 근거는 나눔에 인색하고 남의 처지를 헤아리지 않는 세태에 있다.
이 추운 날 아침 저 사람들이 따뜻한 밥은 먹었을까, 간밤에 불은 때고 잤을까, 이런 역지사지가 우리 사회에서 어느 때부턴가 없어졌다. 오히려 제 가진 것을 은근히 자랑하고, 남이 그렇지 못한 것을 깔보거나 업신여기지는 않았을까. 그런 생각 짧은 행동이 온 사회를 욕망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과잉 소유욕을 부추기는 데 일조했다.
부(富)는 있으나 지각이 없고, 권력과 지위는 있으나 헤아림이 부족한 사람들, 그런 엘리트 계층의 말과 행동이 주는 상처는 급기야 사회 심층에 이질감과 혐오감을 자라게 했고 나아가 불특정 다수를 향한 증오심으로 발전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삭막해진 정도가 아니라 불길하고 섬뜩해졌다. 가족 구성원이 육신 멀쩡하게 그날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것이 고맙고 반가울 지경이 됐다.
며칠 전까지 제 그림자를 끌던 한 인간의 육신이 저렇게 허망하게 한 줌의 재로 변하는 과정을 보면서 새삼 빈손으로 왔다 가는 삶의 허무를 실감한다. 아등바등 산다 해도 우주의 섭리로 보면 촌음이다. 많이 가진 사람들은 하고 많은 중생 중에 왜 자신이 그렇게 많은 부를 소유하게 됐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스님 말씀처럼 그건 하늘이 내게 잠시 재산 관리자의 임무를 맡겼기 때문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법정스님이 "누구한테 주려거든 살아 있을 때 줘라. 소유주가 죽으면 그 물건도 죽어서 소용이 없다"고 한 말씀이나, "입에 말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법구경의 가르침은 필시 베풀기에 인색하고 배려가 모자란 사람들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이 글을 쓰는 기자도 요 며칠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며 깊이 반성하고 있다.
한 가지, 사단법인 `맑고 향기롭게` 측에 부탁할 말이 있다. 스님의 저서를 절판하겠다는 방침(유언)은 거두어 달라는 요청이다. 인간의 탐욕을 베고 소유의 집착을 끊어줄 스님의 분신을 더 많이 우리 사회에 내보내기 위해서다.
[전호림 중소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