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햇발] 법정, MB, 무소유의 삼각관계 / 정남기
한겨레
평생 자기가 한 말을 지키고 실천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없다. 말은 그럴듯하지만 주장을 수시로 바꾸거나 말은 하되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런 면에서 법정 스님은 참 특별한 사람이다.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았고 언제나 변함없이 한길을 걸었다.
그가 남긴 유언이 공개됐다. 자신에 대한 성찰, 상좌들에 대한 당부, 번잡한 장례를 치르지 말라는 내용들이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는 오래전에 비슷한 유언장을 만들어뒀다. 자신의 책 <무소유>에 실린 ‘미리 쓰는 유서’가 그것이다.
“내 그림자만을 이끌고 휘적휘적 삶의 지평을 걸어왔고 또 그렇게 갈테니 부를 만한 이웃이 있을 리 없다. … 가진 것이 없을 것이므로 무엇을 누구에게 전한다는 번거로운 일도 없을 것이다. … 즐겨읽던 책이 내 머리맡에 몇권 남는다면 아침저녁으로 ‘신문이오’ 하고 나를 찾아주는 그 꼬마에게 주고 싶다. … 사리 같은 걸 남겨 이웃을 귀찮게 하는 일을 나는 절대로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흘렀다. 그는 자기가 한 말에 책임을 졌고 떠날 때도 그대로였다. 그 삶의 무게가 가볍지 않은 것은 말이나 책이 아니라 몸소 실천해온 삶의 행적 때문일 것이다.
사실은 한발 더 나아갔다. “그동안 풀어놓은 말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고 했다. 자기 책을 더이상 내지 말라는 것이다. 헛된 말을 하지 않았기에 그에게는 말빚도 별로 없을 듯하다. 그런데 그마저 남기지 않고 모두 거둬가겠다고 한다. 한편에선 이런 생각이 든다. 지나친 것은 아닐까? 혹시 그의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결벽증이거나 정신적 사치는 아닐까?
물론 그 뜻을 정확히 헤아릴 길은 없다.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다. 글이나 말로 남긴 빚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를. 하지만 현실 사회로 눈을 돌려보면 말빚을 거두겠다는 의미를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멀리 갈 것 없다. 주위를 둘러보면 말빚의 무서움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책임질 수 없는 약속을 쏟아내는 정치인들, 무책임하고 편파적인 보도에 무감각해진 언론들, 상황에 따라 슬쩍슬쩍 말을 바꾸는 지식인들…. 누구도 여기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 가운데 이명박 대통령도 있다. 그는 이미 ‘747’(연간 7% 성장, 국민소득 4만달러 달성, 7대 경제강국 진입) 등 허황된 대선 공약으로 여러차례 큰 곤욕을 치렀다. 그런데도 지방선거를 앞두고 다시 발동이 걸렸다. 충북에 경제자유구역을 지정하겠다, 대구와 광주를 연구개발(R&D)특구로 지정하겠다, 원주~강릉 전철을 복선화하겠다, 그의 입에선 날마다 선심성 정책이 쏟아진다.
굳이 이 대통령을 거론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자신의 철학에 갖다 붙이려는 모습이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너무 다른 삶을 살아왔다. 한쪽은 무소유의 삶을, 다른 한쪽은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했다. 그뿐 아니다. 법정 스님은 말보다 행동이 앞섰지만 이 대통령은 그렇지 않다. 책임 못 질 말을 너무 쉽게 한다.
“오래전부터 스님 책을 많이 읽었고 여행 중에도 꼭 들고 다닌다”는 이 대통령의 말이 선뜻 와닿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대통령의 재산 기부가 법정 스님의 ‘무소유’ 정신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청와대 쪽 얘기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걸어온 삶의 흔적이다. 아무리 좋은 말로 포장해도 그것은 바뀌지 않는다. 수백억원의 재산을 기부했다고 무소유 정신의 수호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정말 <무소유>를 애독했다면, 그리고 말빚을 가져가지 않겠다는 유언의 취지를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섣부른 말의 성찬부터 자제할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정남기 논설위원jnamki@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