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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 10-03-19

    법정 스님의 ''절판'' 유언 -장명수 (한국일보 3.19)

본문

[장명수 칼럼/3월 19일] 법정 스님의 '절판' 유언


장명수 본사 고문


지난 11일 입적한 법정(法頂) 스님의 유언장이 17일 공개되었다. 2월 24일에 쓴 유언장은 사회에 남기는 말과 자신의 상좌들에게 남기는 말로 나뉘어 있다. 담담하게 생의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작별의 편지다.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 어리석은 탓으로 제가 저지른 허물은 앞으로도 계속 참회하겠습니다.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롭게' 재단에 주어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토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성불하십시오.>


<인연이 있어 신뢰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 가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 보내주면 고맙겠다…. 내가 떠나는 경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 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


책 사러 갔던 독자들의 실망


가장 관심을 모았던 부분은 그가 생전에 출판했던 책들에 대한 절판(絶版) 선언이다. <그 동안 풀어 논 말 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부디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 주십시오.> 라는 한마디로 그는 단호하게 절판을 당부하고 있다.


법정 스님이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그가 자신의 책들을 절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이 흘러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 독자들과의 인연을 잘라내려는 싸늘한 칼날에 상처 받은 느낌이었다. 이제 서점에서 법정 스님의 책이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마침 그가 쓴 책들이 있다면 사람들은 그 책을 사러 서점으로 가곤 한다. 전국의 크고 작은 서점들은 고인이 쓴 책들을 모아 특별 코너를 만들고, 사람들은 그곳에서 책을 고르며 추모의 마음을 서로 나누게 된다. 이 세상에 책 시장이 생긴 이래 지속되었던 아름다운 풍습이다.


나도 지난 주말 법정 스님의 책을 사러 서점에 갔었다. 스님의 책을 읽으며 조용한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내가 사려는 책은 벌써 품절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며 언제쯤 그 책이 다시 나오느냐고 물었다. 스님이 절판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말이 있어서 책이 안 나올지도 모른다고 점원이 설명하자 사람들은 크게 실망했다. "이제 영영 그 책을 살 수 없는 거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법정 스님의 유언장이 공개되어 절판이 확실해졌는데도 나는 아직 그 사실을 납득하기 어렵다. 책을 계속 출간하든 절판하든 그것은 필자의 선택이다. 또 "그 동안 풀어 논 말 빚을 다음 생으로 가져가지 않으려 한다"는 스님의 절판 이유를 내가 감히 이해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유감스럽다. 정신적 자산이 저술가와 출판사와 서점을 거쳐 독자들에게 전파되는 소중한 과정이 저술가에 의해 거부되었다는 느낌이다.


'맑고 향기롭게' 재단은 스님의 글을 읽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누구든 언제든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방법을 연구하겠다고 밝혔다. 인터넷에 모든 책의 내용을 올릴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그 방법은 스님의 절판 선언과 부딪치지 않는 건지, 과연 실현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인터넷에 올리는 건 가능할까


사랑이니 무소유니 하는 진리를 말하긴 쉽지만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법정 스님은 한평생 자신에게 칼날처럼 엄격하며, 단순하게 검소하게 살기를 원했고, 모든 것을 버림으로써 소유와 관계의 노예가 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얻고자 했다. 스님은 관도 수의도 없이 좁은 대나무 평상 위에 평소의 승복차림으로 누워 다비장으로 향했다.


이 세상 '말의 공해'에 일조한 것 같아 조금이나마 말을 거둬들이는 차원에서 절판을 생각했다는 스님, 글과 말의 덧없음을 절판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깨우쳤던 스님…. 그러나 중생은 여전히 마지막 길에 자신의 책들을 거두어간 스님이 야속하기만 하다.